내용요약 제작사 수리정보 제공 의무화 필요…범용 진단기 제작·SDRM 구축 방안 제시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과 한국소비자원 및 차량기술사회 등이 ‘수리권 보장 : 자동차 정비 및 유지보수 정보 공개’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산학연 관계자들과 함께 자동차 수리권 보장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 박시하 기자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과 한국소비자원 및 차량기술사회 등이 ‘수리권 보장 : 자동차 정비 및 유지보수 정보 공개’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산학연 관계자들과 함께 자동차 수리권 보장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 박시하 기자

[한스경제=박시하 기자] 수리권 강화 움직임이 자동차 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리권은 제품이 고장났을 때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수리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로 최근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수리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산학연 전문가들은 1일 자동차 분야에서도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동시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수리권이란?

수리권은 사용하던 제품이 고장났을 때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고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고장난 제품을 잘 고쳐왔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리 보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소비자의 선택이 아닌 제조사가 만든 절차에 따라 고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LG전자 에어컨을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LG전자 공식 서비스센터다. 공식 서비스센터를 통해 수리 접수를 할 수 있고, 일정을 정하는 과정에서 수리 기사의 일정이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또 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품 교체 비용과 공임비 등도 LG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부품 의무 보유 기간이 남았는데도 부품이 없어서 교체하지 못하면 새 제품으로 구매해야 한다.

물론 다소 비싼 비용 때문에 사설 업체나 전문가를 수소문해 수리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수리하지 않으면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수리를 받기 위해 여름철 에어컨이 고장나면 한 달 이상을 기다리며 더위와 사투를 벌이거나, 겨울철 보일러가 고장나면 집 안에서 롱패딩을 입고 추위를 견뎠다는 후기가 온라인상에 종종 올라온다.

이에 소비자가 제품을 수리할 때 제조사가 지정한 방식이 아닌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도입해 제품을 사용기한까지 불편함 없이 사용해야 하고, 수리비나 일정 등을 정할 때도 소비자가 제조사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직은 생소한 수리권 보장…의무 아닌 권고사항

아직은 수리권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린다. 하지만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이 명시하고 있는 ‘부품 의무 보유 기한’이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용기한 내에 고쳐 쓸 수 있도록 가전이나 자동차 등의 제조사들이 판매한 제품의 부품을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할 것을 정하고 있지만, 이는 권고사항일 뿐 강제 사항이 아니라 사실상 효력이 없다. 또 부품 수급에 차질이 있어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지만, 이에 대해 시정 조치를 내리거나 보상하는 방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소비자의 수리권을 강화한 제도를 시행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일부 제품에 한해 ‘고객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이 소모품샵을 통해 정품 부품과 수리 도구를 구매한 후 삼성전자가 제공하는 매뉴얼에 따라 스스로 부품 교체를 할 수 있다. 다만 자가 수리를 한 이후에는 유상 수리만 가능하고, 방수·방진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서비스센터에서 수리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무상 수리 기간이 끝난 휴대폰의 경우 저렴하게 수리할 수 있고, 서비스센터에 방문하지 않아도 돼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자동차는 수리권이 미흡한 업종 중 하나로 꼽힌다. 자동차 수리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수리 과정에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자동차가 멈추거나 계기판에 경고등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고장이 났는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또 자동차 제작사의 공식 정비센터와 사설 정비업체 중 선택할 수 있지만, 전기차의 경우 공식 정비센터 중에서도 전기차 수리 전문 장비와 인력을 갖춘 일부 센터에서만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 자동차 수리권은 소비자·정비업체 모두에 보장돼야

자동차 업계는 수리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다만 자동차 수리권은 소비자가 수리받을 권리와 사설 정비업체가 수리할 권리가 모두 보장돼야 한다는 게 다른 업종과 차이점이다. 소비자는 공식 정비센터와 사설 정비업체에서 동일한 수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설 정비업체 역시 공식 정비센터와 동일한 수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동차 제작사가 수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사설 정비업체에 자동차의 고장 코드를 진단할 수 있는 진단기, 정품 부품을 구매할 수 있는 대리점에 대한 정보, 자동차 수리에 필요한 정보와 도구 및 교육 등을 충분히 제공해야 공식 정비센터와 동일한 수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전기차, SDV 등 자동차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자동차 제작사와 사설 정비업체 간의 교류가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자동차 제작사도 정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작사에서 공식 정비센터에서 사용하고 있는 진단기 구매처, 정비 매뉴얼, 정비를 위한 교육 등을 제공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제작사에서는 정비 매뉴얼 구매를 차단하거나, 사설 정비업체에서 정비한 이후에는 보증을 해주지 않는 등의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적 재산권 침해와 기술 유출 등이 있다. 또 일부 제작사에서는 사설 정비업체에서 ‘교육 장소가 지방이라 갈 수 없다’, ‘진단기나 정비 매뉴얼이 비싸서 살 수 없다’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전했다. 

자동차 수리권은 소비자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으로 돌아온다. 수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면 공식 정비센터에서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수리비를 낮출 수 있고, 오랜 대기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실제로 수입차의 경우 공식 정비센터의 비싼 수리비 때문에 무상수리 기간이 끝나면 차를 팔아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또 업계에서는 비용과 기술의 측면에서 공식 정비센터와 사설 정비업체 간의 경쟁을 통해 소비자의 효익을 높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 해외의 자동차 수리권은?

해외에서는 한발 앞서 자동차 수리권 보장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있다. 미국 하원 에너지 및 상업위원회의 혁신, 데이터 및 상업 소위원회는 작년 11월 자동차 수리권 관련 법안인 ‘HR 906, REPAIR Act’를 에너지 및 상업위원회 전체 회의에 올렸다. 자동차 정비업체를 운영하는 마리 글로센 캄프 의원을 포함한 50명의 의원의 공동 발의한 자동차 수리권은 만장일치로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자동차 제조사가 자동차 수리 및 유지 보수에 장벽을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 ‘자동차 소유자와 선택한 수리업체가 자동차에서 생산된 수리 및 유지 관리 데이터에 직접 접근하는 것’을 보장하며, ‘중요한 수리 도구 및 장비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고, ‘이해관계자 자문 위원회를 설립해 수리 및 유지보수에 대한 문제’를 조사하는 골자로 한다. 이를 통해 자동차 제조업체의 공식 정비업체가 독점적으로 정비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것을 막고, 사설 정비업체 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에서도 ‘자동차 블록 면제 규정(MVBER)’을 통해 자동차 수리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는 자동차 제조사가 사설 정비업체에 기술 정보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하고, 사설 정비업체가 공식 정비센터와 동일한 품질의 부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를 통해 경쟁이 촉진돼 정비 비용이 감소하고, 사설 정비업체가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소비자들이 양질의 정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 국내 자동차 수리권 보장 위한 논의 본격화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도 자동차 수리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과 한국소비자원 및 차량기술사회 등은 지난달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수리권 보장 : 자동차 정비 및 유지보수 정보 공개’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산학연 관계자들과 함께 자동차 수리권 보장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이 자리에서 임상일 한국자동차전문정비사업조합연합회 이사는 수입차 업체들의 정보 공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수입차 각 사의 진단기를 구매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범용 진단기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이사는 “지난 2015년 개정된 자동차관리법에는 대한민국에서 생산·판매된 모든 자동차에 대해 정비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대차와 기아는 오픈하고 있는 반면 수입차 업체에서는 거의 오픈을 안 하고 있다”며 “연간 1000만원만 내면 오픈을 안 하고 독점으로 가져가도 될 정도로 벌칙이 작기 때문에 벌과점에 대한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자동차 수리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난 2015년 7월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 제49조의 5(정비 장비·자료의 종류 및 제공방법)를 신설하고 자동차 제작사가 사설 정비업체에 정비에 필요한 장비와 자료 등을 제공해야 하고 자료를 정기적으로 갱신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비업계에서는 수리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 정비업체 전문가는 “수입차 수리를 하려면 각 제작사의 진단기를 사야하는데 한 대당 1000만원이 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전체 제작사의 진단기를 모두 구입하려면 수억원이 소요된다”며 “범용 진단기를 만들 수 있도록 프로토콜을 오픈해주면 (정비업체들은) 일정 비용을 주고 구매하고, 업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쓸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포드세일즈서비스코리아 진범수 이사는 현재 제도에 따라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만 이모빌라이저 프로그램 코딩 등 공개하는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보안 서버 구축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진 이사는 미국의 비영리 단체 NASTF와 보안 서버 SDRM을 예로 들며 국내에도 이러한 서버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0년 자동차 제조사와 사설 정비업체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비영리단체 NASTF를 설립했다. 이 단체에서는 서비스 정보, 도구 정보, 추가 교육 등 사설 정비업체가 필요한 부분을 파악해 대응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 관련 자동차 정보 및 시스템에 접근해야 하는 기술자에 자격을 부여하고 SDRM을 운영하는 것이다. NASFT에서 신청서를 받아 승인을 하고 VSP ID를 발급하면, 정비업체는 앱을 활용해 고객 승인 양식을 제출하고 수리를 완료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임월시 국토교통부 자동차운영보험과장은 “전기차를 포함해 내연기관차의 전자화를 거치면서, 최근에는 자율주행까지 이뤄지면서 정비 영역에서 점프업을 해야하는 위기이자 기회”라며 “민간에서는 이런 분야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빠르게 자동차 제작사를 따라잡을 수 있겠냐하는 고민을 하고 계시고, 정부도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리권은 차주들이 가져야되는 권리지만, 제작사들의 지적재산권을 두고 많은 논란도 있고 우려도 있다”며 “제작사들은 정보 유출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정비인들은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을 때 수리를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정부가 먼저하면서 법 개정이나 정책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시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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