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美 그린란드 매입 포함 북극항로 패권 장악 입장 표명
군사·자원 확보·선박 운항비 절감...쇄빙선 확보 선결 과제
존스법 개정·예외 조항 없이는 한국 조선업계 '그림의 떡'
핵심 기술 미국 조선산업 헤게모니 회복 희생양 가능성 높아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쇄빙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한화오션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쇄빙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한화오션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취임식에서 덴마크령인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밝히는 등 북극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최근 국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같은 정책 기조가 장기적 관점에서 쇄빙 연구선과 쇄빙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셔틀탱커 등을 건조한 경험이 있는 한국 주요 조선사들에 호재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 국내 법 개정과 미국 조선산업의 헤게모니 회복 가능성에 대비해 국내 조선업계는 선박 기술 주권 사수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신중론도 공존하고 있다.

미국에 있어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극항로 패권 장악은 러시아와 중국 견제를 위한 군사·전략적 목적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자원 확보와 선박 운항 비용 절감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미국이 세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히 쇄빙선(Icebreaker)의 확보가 선결 과제로 꼽힌다.

이달 초 SK증권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걸프만에서 아시아로 항해하는 일반 LNG운반선은 파나마운하를 통과해야 한다. 이때 평균 30만~50만달러의 운하 통행료를 지불하고 있다. 북극해에는 북동항로(NSR)와 북서항로(NWP)로 두 가지 항로가 있다. 이 LNG선이 러시아에 인접한 북동항로(NSR)를 이용하면 파나마운하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항해 거리 7000㎞가 단축돼 운송 기간도 10일 줄어든다.

물론 NSR을 통과하려면 쇄빙LNG선이 필요하다. 쇄빙LNG선의 건조 비용은 3억3000만~3억8000만달러로 일반 LNG선의 건조가격인 2억5000만달러 대비 초기 투자 비용이 높다. 하지만 선사 입장에선 NSR 이용이 파나마운하 통행료 면제와 운항 거리·기간 절감 효과로 투자비 상쇄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현재 러시아가 NSR을 법적으로 통제함에 따라 미국 국적 LNG선이 NSR 통과 시 30만~100만달러 수준의 쇄빙선 비용을 포함한 통행료를 러시아측에 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는 NSR 대신 알래스카와 캐나다에 가까운 북극해 북서항로(NWP) 통제권을 확보해야 하는 미국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재 NSR은 대형 LNG 터미널과 같은 항만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지만 미국이 통제권을 확대하려는 NWP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특히 러시아는 5척의 핵추진 쇄빙선을 포함해 약 40척 이상의 관련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가 막강한 쇄빙선의 전력화를 이미 마친 상태지만 NWP 통제 강화를 추진하는 캐나다와 미국은 전력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은 해안경비대 소속의 2척이 유일하다. 그나마 중형급 쇄빙선 '힐리(Healy)호'는 화재로 기동 불능상태이며, 건조된 지 50년 이상 지난 '폴라스타(Polar Star)호'는 잦은 고장으로 '드라이도크(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지상에 설치된 도크)'에 거치돼 있다. 작전 가능한 쇄빙선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극 패권에 관심을 보여도 당장 국내 조선사들이 수혜를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한다. 미국이 지난 1920년 제정한 존스법(Jones Act)은 자국 연안을 항해하는 선박(군함·상선 포함)은 반드시 미국에서 건조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미국 항만을 오가는 모든 화물은 미국인 선원이 탑승한 미국 선적의 선박에만 운송하도록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100여년 간 시행된 이 법은 외국 업체의 선박 수입을 가로막아 미국 조선업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자국의 선박 건조 능력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이달 5일 공화당의 마이크 리, 존 커티스 상원의원은 ‘해군 준비태세 보장법’과 ‘해안경비대 준비태세 보장법’을 미국 의회에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외국 조선소에서 해군 함정이나 해안경비대 선박 건조를 금지하는 기존 법에 예외를 두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이 아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나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에 있는 조선소에서도 해군 함정과 해안경비대 선박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게 골자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 중 미국 해군과 해안경비대 선박 건조가 가능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존스법 개정 혹은 예외 조항 발효를 가정해도 미국이 당장 한국 조선소에 쇄빙선을 발주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지난해 7월 쇄빙선 설계기술을 보유한 핀란드와 쇄빙선 건조 경험을 보유한 캐나다와 함께 ‘쇄빙선 건조 협력(ICE·Icebreaker Collaboration Efforts)’ 협정을 맺은 바 있기 때문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외국 조선소를 이용할 의지가 약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2019년 9월 삼성중공업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제5회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에서 러시아 국영 조선소인 즈베즈다와 쇄빙 LNG운반선에 대한 설계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중공업
2019년 9월 삼성중공업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제5회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에서 러시아 국영 조선소인 즈베즈다와 쇄빙 LNG운반선에 대한 설계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중공업

한 연구원은 “다만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이 그린란드 통제와 쇄빙선 및 항만 인프라 구축, 그리고 운항가능 일수 확대를 통해 NWP를 충분한 상업적 루트로 개발한다면 글로벌 선주들의 쇄빙등급 선박 발주 수요는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경우 쇄빙LNG선(Arc7) 건조 경험이 있는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과 쇄빙유조선 건조 경험을 보유하고 있으며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와 함께 쇄빙LNG선 및 쇄빙셔틀탱커 건조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던 삼성중공업의 수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조선업계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특히 한화오션은 지난해 미국 필리 조선소를 매입해 존스법과 관계없이 미국 내 선박 제조 역량을 확보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를 고려하면 미국은 한화오션과 같은 건조 역량이 뛰어난 한국 조선사의 투자를 유도해 미국 내 인프라를 재구축하고 선박 건조를 활성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쇄빙선은 다수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선박이다. 연속적으로 얼음을 깨면서 얼음과의 마찰을 이겨내며 일정한 속도로 항해하기 위해 동급 일반 선박보다 매우 출력이 큰 엔진이 탑재된다. 쇄빙선의 특수한 역할에 따라 선체 외벽은 매우 두꺼운 철판을 사용해야 하며 선박 자체가 무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무게중심을 쉽게 옮기는 별도 장치에 얼음과 선체 사이의 마찰 저항을 줄이기 위해 물분사장치(Water jet)나 공기분사장치(Air-Bubbling)가 장착되기도 한다.

이같은 고도화된 기술 적용은 국내 조선사에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쇄빙선 건조에 쓰이는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한화오션은 필리조선소에서 해당 기술을 활용해 한 척의 쇄빙선이 아쉬운 미국에 선물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핵심 기술이 미국 조선산업의 헤게모니 회복에 전용될 경우 한화오션을 포함한 한국 조선사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12일 열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씽크탱크, 더 케피탈 케이블은 '트럼프 2.0과 한반도'라는 주제의 회의에서 미 의회에 발의된 ‘해군 준비태세 보장법’과 ‘해안경비대 준비태세 보장법’이 동맹을 활용한 단기적 필요에서 비롯됐으며 궁극적으로 미국 조선산업의 핵심 기술 확보에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취재 결과 이 회의에 참석한 마크 리퍼트 CSIS 선임 고문은 "이 법안들은 한국 조선업의 승리가 아니라 미국 조선업 재건의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며 "단순한 수주 확대가 아닌 글로벌 산업 패권 경쟁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도 "한국 조선산업이 미국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자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규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 국내 조선업계가 핵심 기술을 여과없이 미국 쇄빙선 건조에 전부 투여했을 경우 이 기술의 ‘무상 이전’을 원하는 미국의 노림수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지적과 궤를 같이했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는 박주근 대표는 국내 조선사가 미국에서 선박을 생산하더라도 한국이 기술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 대표는 “산업 분야는 다르지만 반도체 산업의 해외 생산 기술 이전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며 “대만 TSMC처럼 고급 기술은 자국에 두고, 중국도 만드는 수준의 낮은 공정은 미국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도 해당 산업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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