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친환경 농업 강조하며 CAP 기후변화 대응 영역 확대
친환경·인플레이션·수입산 압박에 농민들 ‘트랙터 시위’ 벌여
격해진 시위에 놀란 EU...농업 분야 기후정책 철회·환경규제 완화
EU 집행위원회 전경 / 사진=연합뉴스
EU 집행위원회 전경 / 사진=연합뉴스

지구의 마지막 경고선인 1.5℃ 위기가 눈앞에 닥쳤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작년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45℃ 높아졌다. 2015년 국제사회가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산업화 이전 지구 평균기온보다 1.5℃ 상승하는 것을 억제하자'는 뜻을 모은지 8년 만이다.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진행한 것이 무색할 만큼 온도 상승 속도가 가파르다. 이에 창간 9주년을 맞는 한스경제는 그간 천착해온 '1.5°C HOW' 캠페인에 맞춰 인류 생존 최후의 방어선인 1.5°C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지 부문별로 국내외 동향과 쟁점, 대안 등을 종합적으로 엮어 연중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한스경제=신연수 기자] “농민이 없으면 식량도 없고 미래도 없다!(No Farmers, No Food, No Future!)"

유럽연합(EU)은 농업 분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공동농업정책(CAP)’으로 불리는 친환경 농업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점점 줄어드는 소득과 친환경을 명분으로 한 각종 규제에 수입 농산물까지 늘어나자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이 트랙터로 거리를 점령하는 시위를 벌였다. 결국 성난 농심(農心)에 놀란 EU집행위원회는 환경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백기를 들었다.

◆ ‘친환경’ 농업 강조...개정된 CAP 시행

EU 농업·농촌 정책의 뼈대는 1962년 도입한 공동농업정책(CAP)이다. 소비자에게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했던 CAP는 시대가 바뀌면서 기후변화 대응으로 영역을 넓혔다.

가장 주목할 점은 2018년 개편이다. 지난 2018년 6월 EU 집행위원회는 2021~2027년 시행될 CAP를 발표했고, EU 이사회와 의회 간 합의를 이루면서 새로운 CAP가 2023년 1월부터 시행됐다.

새 CAP는 기후변화 대응을 강화하고 농가 간 형평성 실현, 성과 중심 체계로 전환이 골자다.

기존 ‘녹색화 직불금’의 환경보전활동은 기본 준수사항에 추가하고, 의무 준수사항 이상으로 활동을 실천할 때만 인센티브를 지급하도록 했다. 경작지의 4%를 휴경하고, 비료 사용량을 20% 감축하도록 했다. 시비(거름을 주는 것) 중 영양소 손실을 50% 줄이고 2030년에는 살충제 사용 또한 50% 낮추도록 했다. ‘민감한 지역’에서는 살충제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

독일의 경우 현재 14%인 유기농 비율은 2030년까지 30%로 끌어올리고, 농지의 10%를 생물 다양성이 높은 농경지로 유지해야 한다.

소농·청년농에 대한 인센티브도 강화했다. ‘재분배 직불제’는 2013년 CAP 개편 때 도입한 정책으로, 소농을 우대하는 직불금이다. 경작 규모가 1~40ha(헥타르)면 1ha당 65~69유로(9만7000~10만2000원)를, 41~60ha는 39~41유로(5만8600~6만1600원)를 추가 지급한다.

개정 이전에는 재분배 직불제 도입 여부는 회원국 선택사항이었지만, 현행 CAP는 이를 의무화했다. 또 이 예산을 전체 직불제 예산의 10% 이상이 되도록 했다.

이와 함께 EU 회원국은 직불제 예산 중 청년농을 지원하는 예산 비중을 ‘최소 2%’에서 ‘최소 3%’로 높여야 한다. EU 농업 인구 가운데 40세 미만 비중이 11%라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1ha당 134유로(약 20만원)를 최대 5년 동안 120ha까지 지급한다. 다만 농업직업학교를 최종 졸업했거나 농업 학위를 이수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개별 국가가 주도하는 직불제 설계도 주목된다. 기존에는 EU가 제시한 목록을 보고 회원국이 정책적 수단을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회원국이 먼저 정책 목표를 설정한 뒤 EU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행 점검도 회원국과 EU가 함께 하도록 했는데, 개별 회원국의 여건을 고려하고 해당 국가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0㎞가량 떨어진 15번 고속도로 위에서 농민 70여명이 트랙터로 도로 점거 시위를 벌였다. / 사진=연합뉴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0㎞가량 떨어진 15번 고속도로 위에서 농민 70여명이 트랙터로 도로 점거 시위를 벌였다. / 사진=연합뉴스

◆ 인플레이션·전쟁·친환경 압박에 농민들 거리로 나서

너무 규제에만 초점을 맞춘 탓일까. 농민들은 개정된 친환경 농업정책이 시행된 후 어려움이 계속되자 트랙터를 몰고 거리로 나섰다. 농가 소득은 점점 줄고, 친환경을 명분으로 한 각종 규제에 수입 농산물까지 늘어났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정부와 소매업체가 식품 인플레이션을 낮추려고 하면서 에너지·비료·운송에 드는 높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 침공 이후 EU가 쿼터와 관세를 면제해 준 우크라이나로부터 대규모 수입과 EU-남미 블록 메르코수르 간의 무역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면서 설탕·곡물·육류의 불공정 경쟁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여기에 농민들은 농지의 4%를 휴경지로 남겨둬야 한다는 규정과 울타리 복구와 같은 프랑스의 지나치게 복잡한 EU 정책 시행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농민들은 불만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독일과 폴란드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루마니아, 그리스, 스페인, 벨기에에 이어 프랑스까지 시위와 항구 및 도로 봉쇄로 폭발했다.

트랙터 시위는 EU 최대 농산물 생산국인 프랑스에서 가장 격했다. 농부들은 환경 보호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인해 숨이 막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충분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유럽 의회 선거와 2월 말 연례 파리 농업 박람회를 앞두고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이에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농가에 대한 새로운 재정 지원 등을 약속했다.

아울러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경계해 농업용 경유에 대한 보조금을 점진적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환경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 전국농민연맹(FNSEA)은 정부가 발표한 여러 대책에도 다양한 불만에 대한 시위를 벌이며 파리로 향하는 주요 고속도로를 트랙터로 막았다. 브르타뉴의 농부들은 흙 700t(톤)을 고속도로에 버리며 항의했고, 남부 도시 툴루즈 주변에서는 지역 공항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트랙터 시위대 일부가 유럽 최대 규모의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꼽히는 ‘렁지스 시장’으로 접근하자 정부가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장갑차를 추가 투입하는 등 긴장이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교통방해 협의와 대형 유통업체 창고 침입 시도 혐의로 시위 농민 약 100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벨기에에서는 유럽의 주요 교역 관문인 제브뤼헤 항구에서 농민들이 진입로 5곳을 막고 시위를 벌인 데 이어,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브뤼셀 EU 본부 인근까지 트랙터를 몰고 진출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 피에몬테 알레산드리아와 남부 시칠리아섬의 칼리아리항 등지에서 농민 수백 명이 트랙터를 몰고 나와 이탈리아 정부와 EU의 농업 정책을 성토했다.

헝가리·루마니아·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서도 값싼 우크라이나 농산물과의 불공정 경쟁, 농업 차량용 경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농민 시위가 이어졌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농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이밖에 독일에서는 예산 삭감 여파로 농민에 대한 경유 보조금을 줄이기로 했다. 이 문제로 독일 농부들이 올 초 농업용 트랙터 수천 대로 도심을 장악해 교통이 마비됐다.

더불어 독일을 떠나는 농부도 늘었다. 돼지고기는 독일의 대표 수출품이지만, 많은 양돈농가가 스페인으로 사육 기반을 옮겼다. 독일 정부가 지구환경을 외치는 사이 경쟁국인 미국산 농축산물이 많이 들어왔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2021년 녹색당이 집권하면서 농업부 장관 자리를 녹색당 출신이 맡은 점도 농민들의 설 자리를 빼앗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토양·물 보전 등을 이유로 농업·축산업이 축소됐다는 것이다.

스페인 농민 시위대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 국경을 트랙터로 봉쇄했다. / 사진=연합뉴스
스페인 농민 시위대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 국경을 트랙터로 봉쇄했다. / 사진=연합뉴스

◆ 우크라산 농산물 수입 제한 해제 영향도 시위에 영향 끼쳐

농민 시위가 EU 전역으로 퍼지게 된 이유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도 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유럽의 빵공장'이라 불리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흑해 무역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이에 EU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제한을 일시적으로 해제해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유럽 시장에 넘쳐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

BBC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평균 유기농 농장은 약 10㎢인 반면, 유럽의 유기농 농장은 평균 0.41㎢에 불과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불만이 나왔다. 이에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등 우크라이나 주변 국가의 농산물 가격이 급감하면서 현지 농부들은 농작물을 팔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EU가 곧 우크라이나 이웃 국가에 대한 수출에 대해 무역 제한 조치를 취했지만,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금지 조치가 만료되자 부다페스트, 바르샤바, 브라티슬라바 정부는 자체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는 즉시 소송을 제기했고, 관계는 악화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EU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역 자유화 조치를 확실히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농부와 운송업자들이 높은 경유 가격, 보험료, EU 조치, 우크라이나와의 경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폴란드에서는 농민들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폴란드 농민 노동조합은 현지 언론에 “우크라이나산 곡물은 유럽이 아닌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격한 트랙터 시위에 결국 EU 집행위원회가 농업정책을 완화하고 기후정책에서 농업 부문을 삭제했다. / 사진=연합뉴스
격한 트랙터 시위에 결국 EU 집행위원회가 농업정책을 완화하고 기후정책에서 농업 부문을 삭제했다. / 사진=연합뉴스

◆ 결국 ‘백기’ 든 EU...집행위, 농업정책 완화·기후정책 철회

격한 농민 시위에 놀란 EU 집행위원회는 농업 분야 기후정책을 철회하고 친환경 농업정책을 완화하면서 ‘백기’를 들었다.

EU 집행위가 지난 2월 6일 발표한 ‘2040년 기후 중간 목표’에서 농업 분야 감축 목표를 통째로 삭제했다. EU의 기후 중간 목표는 오는 204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90%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초안에는 농업 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5년 대비 30% 감축한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는데 이 부분이 빠진 것이다.

이와 함께 농업용 살충제 감축 의무화 법안도 폐기했다. 집행위는 2030년까지 살충제 사용 50% 감축을 골자로 한 ‘지속가능한 살충제 사용 규제(SUR)'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외에 농업용 경유 면세 유지, 올해 말까지 농지 4% 휴경의무를 면제하고 우크라이나산 저가 농산물 수입 제한 조치 등으로 농심 달래기에 나섰다.

농업정책 기조도 규제·처벌에서 인센티브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미래 농업에 대한 전략 대화’ 기자회견에서 “올바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연 보호를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는 농가가 보상받을 수 있도록 농업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고 밝혔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농가가 하는 일을 늘 처벌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인센티브를 지급해 농민들이 ‘환경 홍보대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환경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EU 집행위는 기존 2023~2027년 시행 CAP 일부 조항 변경도 추진했다. 환경 보호를 목적으로 도입한 CAP ‘휴경 의무’ 지침을 사실상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올해 1월 농업 양극화 해법을 근본적으로 모색하겠다면 농식품 업계와 농민단체, 하계 등이 참여하는 전략대화를 출범시켰고, 8개월 만에 나온 전략대화 보고서에서 인센티브 강화를 촉구했다.

보고서는 EU CAP의 직불금을 농지 크기에 따라 일괄 분배하는 대신 농가의 사회·경제적 필요성을 고려해 선별적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CAP 예산 외에 농업 분야의 친환경 전환을 돕기 위한 임시 성격의 새로운 기금 신설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밖에 농업 탄소 배출의 주범으로 지목된 축산 농가가 자발적으로 폐쇄를 결정하면 보상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지난달부터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전략대화 보고서 결과를 새 농업정책 로드맵에 반영할 계획이다.

전문가들도 농업과 환경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웝크 훅스트라 EU 기후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균형 잡힌 접근을 해야 한다”며 “대다수의 시민은 기후벼화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길 원하지만, 그들의 생계에 미칠 영향도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비스툴라대학교의 니콜라스 레비(Nicolas Levi) 교수는 “EU는 기존의 무역정책이 수준 높은 환경·기후정책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대표적인 과제는 시장의 대외 개방성을 관리해 EU 농가에 적용되는 엄격한 환경·보건·사회적 요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값싼 역외 상품의 과도한 유입을 방지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또 EU의 환경·기후정책도 규제를 통해 농업 부문에 제약을 가하던 기존 접근법에서 벗어나 농업 현장의 복잡성과 국가·지역 수준에서 관찰되는 맥락의 다양성을 잘 반영할 필요가 있다”며 “이러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농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농업과 환경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정책적 개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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