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에너지 공급 정책...LNG선 수요 426척”
상선 발주·함정 사업 아웃소싱→중장기 성장 모멘텀
“실용적 대응...美 필요 충족·K-조선 실익 챙겨야”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과 미국발 관세폭탄의 대형 이슈를 연이어 받아든 국내 기업들의 경제활동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조선을 제외한 한국 주력산업 대부분이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8일 업계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의 파면과 미국의 관세 정책이 맞물리며 자동차·철강·반도체 등 거의 모든 업종의 기업들이 투자 및 대형 인수합병 등과 관련된 판단을 보류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조선산업은 이런 관측의 열외가 되리라는 것이 업계·전문가의 중론이다.
지난해 말부터 미국은 한국에 조선업 협력을 꾸준히 요청해 오고 있다. 미국의 러브콜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의 단계를 뛰어넘어 관련 제도와 법안 발의로 실행이 가시권에 접어든 상태다.
이미 수차례 보도된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내놓은 중국산 선박의 미국 항만 입항 시 수수료 부과 제재안 ▲선박법 ▲해군·해안경비대 준비태세 보장법 등 자국 상선 및 해군 함정 증대와 관련한 주요 정책들이 발의됐거나 시행을 앞두고 공청회까지 마쳤다.
여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화석연료에 기반한 저렴한 에너지 공급 정책까지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상선, 함정 부문에서 국내 조선사의 장·단기적 수혜 가능성과 연결된다는 분석이다.
USTR의 중국산 선박 수수료 제재안은 한국이 중국에 점유율을 빼앗긴 컨테이너선과 탱커(유조선) 시장에서의 단기적 반사이익 효과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 선종별로 제재안에 따른 영향을 추정했을 때 미국 기항 선박의 약 83%가 수수료 부과 대상이 되는 컨테이너선 시장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탱커 역시 제재 대상 선박의 규모가 2번째로 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 박현준 책임연구원은 “현재의 내용으로 제재안이 시행될 경우 향후 글로벌 선사들이 중국 대신 한국 조선사에 이 선종을 발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제재안 발표 후인 지난달 대만 에버그린은 한화오션에 2만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6척을 발주했으며 삼성중공업도 그리스 선사 TEN으로부터 1조9000억원 규모의 셔틀탱커 9척을 ‘싹쓸이’ 수주한 바 있다. 중국 대비 열세였던 컨테이너선, 탱커 시장에서의 수주가 현실로 나타났다.
K-조선 고부가가치선의 대명사로 불리는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도 미국발 수주 훈풍을 맞이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러한 분석은 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공급 정책이 석유, 천연가스 공급 확대를 촉발하고 해외 수출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전망에서 비롯된다.
박 연구원은 “실제로 바이든 정부가 중단한 LNG 액화터미널의 신규 승인이 재개됨에 따라 수출(액화) 용량이 2030년에 약 1억9200만톤으로 2025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며 “해당 프로젝트의 80~90%가 이미 매매 계약이 체결된 것을 감안하면 생산 개시 시점에 맞춰 미국의 LNG선 수요(2035년까지 약 426척)가 안정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미국 국적 상선 선대를 2034년까지 250척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선박법’도 국내 조선사의 중장기적 수혜 가능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확인 결과 선박법은 지난해 말 발의됐으나 미 의회의 회기 종료에 따라 현재 자동 폐기된 상태다. 하지만 올해 미 의회 임기 내에 재발의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한화그룹이 작년 12월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해 현지 건조 기반을 마련했다”며 “이는 향후 국내 조선사가 미국으로부터 LNG선을 비롯한 상선을 수주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물론 한화의 필리조선소 인수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미국 내 조선산업 생태계를 감안하지 않은 ‘무리수’였다는 일각의 반론도 여전히 공존한다.
미국은 상선뿐만 아니라 해군 함정 분야에서도 아웃소싱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대비 조선 인프라가 부족한 가운데 해군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정책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우선 함정의 유지보수(MRO)를 아웃소싱함에 따라 국내에서는 특수선 사업을 영위 중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MRO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함정 및 주요 구성 요소를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없도록 한 현행법까지 손질하고 있다. 해외 조선소에서 함정·주요 요소의 건조를 허용하는 내용의 ‘해군·해안경비대 준비태세 보장법’이 지난 2월 미 의회에 발의됐으며 이에 따라 국내 조선사가 미 군함 건조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해군 함정 건조 및 MRO 시장 규모는 2029년 2927억달러로 성장해 상선 시장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세계에서 국방비 지출이 가장 많은 미국이 이를 주도할 것이란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중국의 조선·해운 산업 견제를 위한 현실적 대안 중 하나로 미국이 한국에 조선산업 협력을 타진하고 있는 만큼 정부는 대미 협상에서 조선업을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양종서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대통령 파면과 6월 3일 조기 대선 확정으로 국내 조선산업은 4개월 간 지속돼 온 탄핵 정국으로 인해 처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며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자국 상선·해군 함정 재건책에 따라 중국의 조선산업을 강력히 제재함과 동시에 동맹인 한국의 주요 조선소에 투자 및 기술 협력을 구하는 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남은 2개월여 동안 정부와 국내 조선업계는 미국의 ‘구애’를 적극 활용해 국익을 최우선으로 가장 이상적인 액션플랜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실용적인 대응을 통해 미국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면서 동종 업계와 정책 당국 모두가 실익을 취하는 합리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임준혁 기자 atm1405@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