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임준혁 차장.
산업부 임준혁 차장.

|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 돕는 것 중에 하나가 망하면 다른 쪽도 위태로워진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던 이 사자성어가 21세기 미국과 중국 간 해양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해사산업(해운·조선)을 가운데 놓고 미중 양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순망치한’을 악용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에 있어 미국과 중국은 남의 나라다. 하지만 지정학적 관계가 개입하면 현실적으로 두 나라의 헤게모니 싸움에 타의적으로 말려들 수 밖에 없는 취약성 또한 갖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14일부터 중국인·기업이 운영하는 선사와 중국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을 대상으로 자국 항만 입항 시 수수료를 부과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USTR의 입항 수수료 정책은 애초 중국의 해운·조선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시행 사흘 전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 건조된 자동차운반선에 대한 입항 수수료를 톤당 46달러로 돌연 인상했다.

6월 말 기준 현대글로비스는 총 96척의 자동차운반선을 운용하고 있다. 이 중 30여척을 미국으로 수출되는 국산 완성차의 해상운송에 투입하고 있으며 지난해 미국 항만에 입항한 횟수는 170회, 전체 완성차 해상운송 매출에서 미국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소비자들에게 품질이 우수한 차량을 토요타, 벤츠 등 경쟁사 대비 착한 가격으로 공급해 오던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글로비스가 미국 당국의 중국 견제라는 명분에 밀려 동맹국으로서의 ‘선의의 입술’을 망하게 한 사례란 지적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순망치한의 원리를 악용했다는 말과 진배없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권남연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 20일 열린 ‘2025 국제 해양 유무인체계 컨퍼런스’에서 “미국 내에서도 자국 해군력 재건의 현실적 대안인 한국 조선업계가 한국에서의 함정 유지·정비·보수(MRO)에서 시작해 최종적으로 함정 신조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법·제도 장벽 극복을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해군 전략 자산이 현존하는 위협인 중국의 코 앞에서 이뤄지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가 서로 도와야 할 처지는 맞지만 사실상 적인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든 한국에서 자국 함정을 건조해야 하는 리스크까지 안고 가는 것에 미국은 주저한다는 지극히 '자국 중심주의'의 발로라는 지적이다.

이는 역으로 중국 입장에서도 순망치한 논리의 악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 14일 중국 상무부는 한화필리조선소를 포함해 한화오션의 미국 내 자회사 5곳에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이번 조치가 한화오션뿐 아니라 미국 진출을 검토 중인 HD현대와 삼성중공업 등 다른 국내 대형 조선사의 구상을 원천 차단한다는 측면에서 압박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화그룹의 필리조선소에 대한 투자 확대와 이에 따른 설비 증설 과정에서 한화오션 본사의 인력과 기술이 현지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한화오션이 제재 대상 5곳을 돕고 있다는 인식을 충분히 가질 수 있고 ‘한화오션=미국’이란 흑백논리로 접근해 향후 한화오션 본사까지 제재 대상에 추가할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상 미국과 한편인 한화오션에 제재를 가하면 미국이란 껄끄러운 상대방(입술)이 무너지게 되고 치아에 해당하는 한국 조선업계도 시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때 입술은 동시에 한국이 될 가능성도 높다. 한국과 중국은 조선산업에서 경쟁 관계이면서 동시에 협력도 의외로 많이 맺고 있는 동반자적 성격이 짙다. 한화오션은 거제에서 건조되는 선박 블록의 상당수를 중국 산둥성에 위치한 옌타이(烟台)에서 생산·조달하며 주요 조선사들은 중국산 기자재를 수입해 활용하고 역으로 선박 엔진 등 국산 기자재의 중국 수출도 상당한 수준인 만큼 한중 간 조선 협력 비중은 미국보다 월등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한국산 선박 엔진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현실을 미국과의 패권 다툼이란 명분을 얻기 위해 한국이란 중요한 입술을 망가뜨린다면 중국 조선 산업에 있어서도 마이너스로 작용할 공산이 다분하다.

미중 간 해양 패권 경쟁 심화는 진영 논리를 의식하지 않고 사업을 영위해 온 한국 조선업계에 미국과 중국 중 양자택일을 강조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중국 입장에서도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 제재란 압박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위에 제시한 단순한 등식에 의해 지금까지 경쟁과 보거상의(輔車相依)로 대변돼 온 한중 간 조선산업 협력이 마스가로 인해 상실될 가능성까지 감내하며 한국에 견제를 날리는 속내는 편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에 벌어진 미중 간 순망치한 논리에 한국 해운·조선이 휘말리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업계와 정부 당국, 미중 외교 채널의 ‘유연하고도 합리적인 접근’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씁쓸한 가을이다.

임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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