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인 산업2부 차장 
고예인 산업2부 차장 

|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미국 반도체 지원 정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기업 지분 참여를 요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은 업계 전체를 흔들어 놓고 있다.

사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현지 투자 확대와 생산 기반 확보를 위해 보조금을 탐내왔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조금이 ‘순수한 지원금’이 아니라 ‘투자 명목의 지분 확보’로 바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는 단순히 자국 내 공장 건설을 독려하고 보조금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를 열어주게 되는 셈이다.

한국의 반도체 쌍두마차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은 깊어진다.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이들 기업은 미국의 초대형 시장과 인프라를 무시할 수 없다. 인공지능, 클라우드, 전기차 등 차세대 산업의 심장이 되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 정부의 입김을 거스르는 선택지는 현실적으로 제한적이다.

그러나 순수한 금융 지원이 아니라 지분이라는 이름의 직접적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상황은 한층 더 미묘해진다. 이는 곧 ‘기업의 자율성과 기술 주권’을 뒤흔드는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경영권 안정성의 위협이다. 지금까지 삼성과 SK는 오너십 구조와 특유의 지배구조를 통해 글로벌 전략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주주로서 경영에 의견을 개진하거나 주요 의사결정에 간섭한다면 기업의 전략적 유연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삼성이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있을 때 속전속결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율적 판단력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국경 너머 정부가 공식적 주주로 참여한다면 투자 타이밍, 연구개발 방향, 신시장 진출 과정마다 보이지 않는 신호와 조율 요구가 더해진다. 궁극적으로 기업의 의사결정 속도와 질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둘째, 기술 주권의 잠식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의 핵심 무기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메모리 기술, 설계·제조 노하우는 글로벌 시장의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산이다.

미국이 지분 참여를 계기로 기술 협력, 이전 요구를 강화한다면 우리는 자칫 전략 기술을 ‘국가 차원에서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동맹국과 협력의 틀 안에서 기술을 나눴다고 하지만 지분 교류가 있을 경우  한국이 통제할 수 없는 ‘내부 압력’의 형태로 변모할 수 있으며 이는 곧 기술 독자성 기반 약화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셋째, 글로벌 투자 전략의 왜곡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과 SK는 이미 미국, 중국, 동남아에 걸쳐 다변화된 생산 및 연구개발 거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주주로 참여한다면 투자의 우선순위는 ‘미국 내 투자 확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기업의 전략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끌려다니는 구도를 고착화시킨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명분은 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하는 만큼 단순한 보조금 수혜자로 한국 기업을 두기보다는 지분 참여를 통해 ‘투자의 확실한 보전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또한 이는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확실한 동맹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 이 논리가 ‘지분 내주기’라는 치명적 딜레마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성과 SK는 이미 미국 현지에서 수십조 원 단위의 설비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텍사스 테일러시에 짓는 삼성전자의 첨단 파운드리 공장, 인디애나와 오리건 등에 잇따라 투자하는 SK하이닉스의 패키징·AI 반도체 라인 등은 그 자체로 미국 경제와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내 대규모 설비 투자와 고용 창출을 약속했지만 추가로 지분을 넘기는 일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협력의 궤적이 아니라 통제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미국 시장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글로벌 경쟁의 중심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하는 강요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조금이 ‘지원’에서 ‘투자’로 바뀌는 순간 그 투자가 가져올 그림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도체가 단순한 메모리 조각이 아니라 국가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보이는 보조금의 달콤함 뒤에 숨어 있는 ‘지분의 덫’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당장의 성과와 미래의 생태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아야 할 분기점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고예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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