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항공 재난 영화 ‘비상선언’을 봤다.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에 직면한 항공기가 더 이상 정상 운항이 불가능한 경우 무조건 착륙을 요청하는 항공 용어다. 영화에서 소시오패스 생물학자는 승객 전원이 실험실 쥐처럼 죽기를 바라며 기내에 바이러스를 살포한다. 기장을 포함해 승객 40%가 사망하면서 기내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항공기는 착륙 허가를 받지 못해 회항하면서 비상선언을 발동한다. 영화 감상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갖는 메시지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지도자는 위기상황에서 어떠해야 하는지, 또 공동체 앞에서 개인은 어떤 위치를 갖는 지다.

영화 속에서 승무원들은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할에 충실한다. 자신들 또한 테러에 노출됐지만 본분을 다하는 모습에서 평범한 직장인을 떠올렸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위기 앞에 담담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살고 싶은 본능은 이성을 압도한다. 특히 전체 승객들 목숨을 책임지는 기장이란 위치에 이르면 간단치 않다. 영화에서 기장은 승객들 목숨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고독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항공기 컨디션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서울공항을 포기하고 성무공항을 착륙지로 결정한다. 기장은 누구보다 항공기 컨디션을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윤석열 정부가 ‘비상선언’에 다름없는 위기를 맞았다. 출범한지 100일도 안 된 상황에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20%대 초반까지 주저앉았다.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더는 담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크게 선회하든지 비상선언을 선포해야할 지경이다. 한국갤럽 8월 첫째 주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24%를 기록했다. 반면 부정평가는 66%로 긍정과 격차는 3배로 벌어졌다. 긍정평가는 전주 28%로 처음 20%대에 진입한 뒤 낙폭은 확대됐다. 이정도면 민심이 떠나갔다 해도 과언 아니다. 콘크리트 지지층을 제외하면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들 가운데 절반은 떨어져 나간 셈이다.

윤 대통령은 휴가 계획까지 취소하고 서울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심각성을 인식한 결정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여론을 동력 삼아 작동한다. 민심을 거스른 정권 가운데 성공한 정부는 없다. 지난 7월 해외로 도피한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전 대통령도 분노한 민심 앞에 무릎 꿇었다. 스리랑카 시위대는 국가부도를 초래한 무능한 정권을 탄핵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권력독점과 부정부패를 더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 상황을 스리랑카에 견주는 건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분노한 민심은 언제든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이들은 인사(23%)와 경험‧자질부족‧무능(10%), 독단‧일방(8%), 소통 미흡(7%)을 꼽았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는 드러났다. 국민들은 검찰 출신 편중 인사와 친분을 토대로 한 측근 인사가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평생을 수사검사로 살아왔다. 국정운영에서 경험과 자질 부족은 어쩌면 예견됐다. 관건은 부족한 자질과 경험을 좋은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보완할 수 있었음에도 소홀했다. 국민들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오불관언 인사와 내로남불 정책 추진에 넌덜머리를 낸 결과는 정권교체였다.

출범 초기 인사는 실패했다. 국민들은 별반 다를 게 없는 윤 정부에 실망과 함께 등 돌렸다. 이제라도 국민 눈높이에 맞추고 소통에 나서야 한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 경찰국 신설, 반도체 인력 15만명 양성, 5세 취학 등을 추진하면서 여론수렴 절차를 건너뛰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해 당사자를 설득하고 국민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대신 우리가 하는 일은 옳다는 독선에 빠졌다. 지지층은 결단이라고 치켜세웠겠지만 중도층이 등 돌린 이유다. 국정운영은 상명하복과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검찰 조직과 다르다. 대화와 합의를 토대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대통령실 이전이 아무리 옳다 해도 여론수렴 절차를 건너뛴 건 오만했다. 또 반도체 인력 양성이 필요해도 수도권 대학만 살찌고 지방대학은 소외된다는 여론을 살펴야했다. 경찰국 또한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면 경찰을 설득하고 국민들에게도 당위성을 알리는 과정을 가져야 했는데 소홀했다.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국정기조를 선회해야 한다. 또 하나. 관용과 포용도 중요하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젊은 당대표를 몰아내기 위해 작업했다고 보고 있다. 영화 ‘비상선언’에서 승객들은 착륙을 포기한다. 승객들이 자기 목숨을 내놓은 건 가족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서였다. 영화적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감동시킨다면 어떤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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