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APEC CEO 서밋 의장인데 행사일에 출석 요구
정치적 목적 앞서는 국감, 재계 "경영활동 위축" 우려
|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이재명 정부의 첫 국정감사가 시작된 가운데 재계 전반에 걸쳐 긴장감이 감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를 포함한 약 200명의 기업인이 증인 명단에 오르면서 경제계는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기 침체, 미국 관세 리스크, '노란봉투법' 등 각종 불확실성에 직면한 가운데 정치권이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3일 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이번 국감에 출석하는 경제계 인사만 200명에 육박한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였던 지난해 기업인 증인, 참고인 159명을 뛰어넘는 수치다. 앞서 민주당은 국감에서 기업인 부르는 것을 최소화하겠다고 했지만 올해도 보여주기식 국감으로 '기업 길들이기'가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는 플랫폼 과다 수수료, 가맹사업 불공정 거래, 산업재해 등 각 상임위별로 산적한 현안을 점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APEC 정상회의라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이뤄지는 대규모 기업인 소환을 두고 재계에서는 경영 활동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생산적인 정책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목소리가 교차한다.
◆ 플랫폼·안전·불공정 거래…주요 쟁점은?
국회가 기업인들을 소환한 명분은 다양하다. 각 상임위는 저마다의 현안을 내세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정무위원회는 최태원 회장을 상대로 SKT의 SK스토어 지분 매각 등 계열사 간 거래 과정의 불공정 지원 의혹을, 쿠팡 김범석 의장에게는 온라인 플랫폼의 과도한 수수료와 불공정 거래 관행을 집중 질의할 예정이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을 소환해 최근 알리익스프레스와의 협업 과정에서 불거진 소비자 정보보호 미흡 문제를 다룬다.
행정안전위원회는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을 소환해 지난달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자원) 화재와 관련 사용된 배터리와 관련된 질의와 소명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미국 조지아주 현지 공장에서 발생한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건에 대해서도 질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대표이사도 행안위 증인으로 채택됐다. 최근 에너지 업무가 환경부로 이관되면서 에너지 정책 효율성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산업 경쟁력 약화 우려 관련해 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한편, 행정안전위원회는 현대제철 당진공장 하청업체 파업 사태와 관련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한 증인 채택을 철회했다. 이번 결정은 현대차 측이 해고 노동자 등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데 따른 것으로 당의 '기업인 증인 최소화' 방침과는 무관하다는 방침이다.
이 외에도 국토교통위원회는 잇따른 중대재해 사고 책임을 묻기 위해 10대 건설사 중 8곳의 대표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반복되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통신 3사 CEO를 대거 증인 명단에 올렸다.
◆ '보여주기식' 국감…깊어지는 재계의 한숨
올해 국정감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연 '보여주기식' 기업인 소환이라는 비판이다. 국회 각 상임위는 경쟁적으로 총수와 CEO들을 증인으로 채택했는데 그 수가 200명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민생 국감'을 표방하며 기업인 증인 채택을 최소화하겠다던 여야의 약속이 공언(空言)에 그쳤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국가적 행사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자 'APEC CEO 서밋' 의장을 맡은 최태원 회장까지 소환한 것은 국회가 경제 외교와 국익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이처럼 국회에 'CEO 출석부'가 만들어지자 재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들은 국정감사 대응을 위해 법무, 홍보, 대관 등 관련 부서를 총동원해 비상대응 체제에 돌입했다. 수십, 수백 쪽에 달하는 예상 질의응답집을 만들고 국감 리허설까지 진행하는 등 막대한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국회의 감시와 견제 기능은 존중하지만, 정책 대안 제시보다는 기업인 개인에 대한 질타나 망신주기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세 전쟁으로 총수들이 1분 1초를 다투며 현장을 지휘해야 할 시기에 국회가 실효성 없는 '호통 국감', '망신주기'로 기업 경영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며 지적했다.
경제계는 국회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고 있다. 국정감사가 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건전한 발전을 유도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과도한 기업인 소환은 '보여주기식' 정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의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증인을 신청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 국정감사가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는 행태를 반복할지, 아니면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생산적인 장이 될지 재계의 눈과 귀가 국회로 쏠리고 있다.
고예인 기자 yi4111@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