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일 붐 일었던 2010년대와 달라...업계·사우디, 증산 ‘신중’
결국 본심은 사우디의 대미 투자 ‘확대’
[한스경제=신연수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유 증산을 통해 유가를 낮추려 시도하고 있지만 정권 초기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미국 셰일업계는 무조건적인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배신’으로 증산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본심은 사우디의 대미 투자 확대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석유 증산 압박이 통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원유 증산을 위해 관련 규제 완화를 약속했으나, 미국 내 셰일오일 업계는 규제 완화 정도와 상관없이 증산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업계 고위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는 미국 셰일업계가 성장 단계를 벗어나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산업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WSJ은 진단했다.
미국 셰일업계는 2010년대 ‘셰일 혁명’을 거치며 급성장했다. 당시에는 일명 ‘와일드캐터(Wildcatter)'라 불리는 모험적인 소형 시추회사들이 난무하며 경쟁적으로 시추구를 늘렸다. 하지만 셰일 붐이 꺼지면서 미 셰일업계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쳐야 했고, 와일트캐터가 사라진 자리는 엑손모빌 같이 강한 규율을 받고 이익의 주주환원을 최우선 경영 목표로 삼는 거대 에너지 상장 기업들이 차지하는 결과로 귀결됐다.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들도 미국 셰일업계가 당장 생산을 크게 늘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유가를 낮출 현실적인 방법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실질적 리더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설득해 원유 공급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직 미 관리들을 통해 글로벌 원유 공급을 추가로 늘릴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이는 트럼프 측에도 공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 美 셰일업계, 석유 증산 ‘부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셰일오일 시추 관련 규제를 철폐하고 미국 내 석유 생산을 늘리겠다고 공약해 왔다. 시추 확대를 의미하는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은 그가 즐겨 사용하던 선거 구호였다.
유가가 내려가면 인플레이션, 고금리 등 미국이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를 압박해 우크라이나 전쟁도 끝낼 수 있을 것이란 게 트럼프 대통령의 계산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를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국제유가는 배럴당 73.16달러로 2022년 평균 94달러를 넘었던 것보다 낮은 수준이다. 2022년 당시 미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5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지금은 3.10달러 수준까지 내려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미국인의 에너지 비용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키스 켈로그 전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는 유가를 배럴당 45달러까지 낮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도록 압박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유가가 이렇게까지 떨어지면, 트럼프의 핵심지지 기반인 미 셰일업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유가가 45달러 이하로 급락하면서 사우디와 러시아 간 시장 점유율 전쟁이 벌어졌고, 그 여파로 수십 개의 미국 셰일업체가 파산한 바 있다.
다이아몬드백 에너지(Diamondback Energy)의 케이스 반트 호프 사장은 “기업들이 이제는 무조건적인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며 “셰일 산업은 전과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우드 매켄지(Wood Mackenzie)의 에드 크룩스 미주 부회장은 “미국 원유 생산량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결국 행정부가 생산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으며,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규제 변화 중 석유 생산의 경제성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올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석유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미국 원유 생산량이 사상 최고 수준이며, 유가가 급등하지 않는 한 올해 생산 증가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에너지부는 올해 말까지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1370만 배럴로 약 2% 증가한 후, 2026년까지 보합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사우디도 증산 ‘신중 행보’...OPCE+ 역시 기존 정책 고수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유가가 하락하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사우디는 사회복지 지출, 시민 보조금,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를 유지하려면 충분한 재정이 필요한데,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사우디가 올해 재정을 균형 있게 운영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유가 정책을 둘러싼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상황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대규모 증산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이는 러시아와 이란에 대한 석유·가스 제재를 추진하려는 그의 계획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제재가 시행되면 원유 공급이 줄어 유가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유가를 낮추겠다는 트럼프의 공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행해졌던 ‘배신’도 사우디로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사우디는 2019년 공급 과잉 사태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즉각적인 증산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1기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제재를 앞두고 사우디 등 걸프 3국에 증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트럼프가 일부 아시아 국가에 이란산 원유 수입 예외를 허용하면서 시장에 예상보다 많은 원유가 풀렸고, 결국 공급 과잉으로 유가가 하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사우디는 원유 시장 안정을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OPEC+는 사우디를 포함한 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간의 협의체로, 유가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우디의 외교 기조도 과거와 달라졌다. 2018년까지만 해도 사우디는 이란 핵합의에 반대하며 강력한 제재를 지지했지만 최근에는 직접 핵 협상에 참여하려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사우디 관계자들이 전했다.
뿐만 아니라 OPEC+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도 기존 감산 정책을 고수하기로 했다. OPEC+는 3일(현지시간) 화상회의로 장관급 감시위원회(JMMC)를 개최하고 기존의 합의대로 4월 1일부터 증산을 시작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JMMC는 석유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OPEC+에 행동 방침을 제시하는 곳이다.
OPEC+는 현재 일평균 586만 배럴의 감산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위원회는 이날 지난해 11, 12월 데이터를 검토한 후 “OPEC 및 비OPEC 국가의 전반적인 적합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생산량에 대해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유가 인하 요청을 일축한 것이다.
◆ 본심은 ‘대미 투자 확대’
유가 하락과 석유 생산 확대를 주문한 트럼프 대통령의 본심은 결국 사우디의 ‘대미 투자 확대’라는 분석도 나왔다.
최진영 대신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메시지는 대미 투자 증액이라고 분석했다. 사우디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로 압박하면서 사실은 다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 하락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도 사우디의 대미 투자 계획과 관련해 향후 4년간 6000억~1조달러 수준으로 더 증액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며 “2026년 11월 중간선거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지금은 유가발(發) 물가 안정보다 미래 고용을 위한 외자 유치가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즉 유가가 떨어지더라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금리 인하를 방해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최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약간의 허세와 함께 언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은 그의 워딩이 아닌 본심을, 언론의 공포 메시지가 아닌 실제 수급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 때”라며 투자 유의를 당부했다.
신연수 기자 yshin@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