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극한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정기국회가 블랙홀에 빠졌다. 9월 정기국회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농사로 치면 한 해를 결산하고 다음해 모종을 준비하는 자리다. 국민 세금은 어떻게 쓰였는지, 정책은 제대로 집행했는지, 또 내년 살림은 어떻게 꾸릴지 따지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단식을 둘러싼 강경 국면에서 정기국회는 실종됐다. 사면초가에 처한 민생경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양심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은 관심 밖이고 정쟁에만 매몰된 그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정치 혐오와 정치 무관심은 정치 무용론으로 확대된다.
한국경제를 둘러싼 위기 조짐은 뚜렷하다.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선지 오래고 경제 성장률은 1%에 머물러 있다. 기업 수익은 감소하고, 금융기관 연체는 급증하고 있다. 가계 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어 금리정책은 제한적이다. 올해 세수도 구멍 났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국세 수입 재추계’에 따르면 올해 국세 수입은 59조 원 가량 부족하다. 기존 세입 예산(400조5000억원) 대비 59조1000억원 줄어든 341조원4000억 원 규모다. 수출 부진과 기업 영업이익 감소, 부동산 경기 위축 등 악재 탓이다. 민생은 복합골절로 신음하는데 정치는 치킨게임을 불사하며 국민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다.
엊그제 전주에서는 또 참담한 일이 일었다. 생활고에 허덕인 40대 여성이 숨진 지 한참 만에 발견됐다. 시신 옆에는 출생 신고가 안 된 네 살배기 아이가 있었다. 여성의 우편함은 각종 체납 고지서로 빼곡했다. 건강보험료는 56개월 밀려 체납액만 118만6530원에 달했다. 또 반년 동안 관리비(월 5만원)와 두 달 치 월세, 석 달 치 전기요금(21만4410원)이 밀렸다. 5월 이후 도시가스마저 끊긴 것으로 파악됐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행정은 무얼 했는지 책망하는 한편 어디에도 도움청할 곳 없는 붕괴된 사회안전망 앞에서 절망한다. 이럴 때 정치는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대표가 입원하자마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단식 투쟁과 구속영장 청구 사이에는 어떤 명분도 관용도 없다. 증오만 있을 뿐이다. 애초 이 대표 단식에서는 마땅한 명분을 찾기 어렵다. 집권여당이 잘못하고 있다면 제1당 지위를 이용해 얼마든 국회에서 견제할 수 있다. 그런데 최대 의석을 가진 제1당 지위를 내려놓은 채 당대표 단식이라는 뜬금없는 일을 벌였다. 공감도 감동도 없는 단식에 국민은 어리둥절하다. 여론은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한 정치 쇼로 해석했다. 그렇다 해도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을 조롱하는 집권여당 행태는 정도를 넘어섰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단식을 만류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지금 단식하고 계신가요? 잘 모르겠습니다”며 야유했다. 또 한동훈 장관은 “수사 받는 피의자가 단식해서, 자해한다고 해서 사법 시스템이 정지되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안 된다. 앞으로 잡범들도 이렇게 하지 않겠나”며 날선 발언을 내놓았다. 설령 정치 쇼일망정 단식 중인 상대에 대해 할 말은 아니다. 관용과 협치가 사라진 여의도는 삭막한 전쟁터로 전락했다. 상대 정치 행위에 공감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대화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한데 여야는 공격에만 치중하느라 퇴로를 차단했다.
민주당은 한덕수 총리를 탄핵하면서 내각을 통솔하지 못한 책임을 들었다. 그런 이유가 탄핵 사유가 되는지 의문이다. 기각될 게 빤한 탄핵 카드를 꺼내든 건 무모하다. 굳이 통솔 책임을 물을 것이라면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게 수순이다. 민주당 스스로 빈약한 탄핵 명분을 자인한 건 아닌가 싶다. 원내 최대 의석을 확보한 제1당 대표 단식과 단식을 비웃는 여당 대표, 그리고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는 야당 모두 한심하다. 이들에게 국민은 필요할 때만 동원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야당 대표가 입원하는 날 보란 듯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정권은 국민들 눈에 폭주로 비치고 있다.
21일 국회에서는 희한한 표결이 예정돼 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과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 건의안을 동시 표결한다. 국민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어처구니없는 표결을 지켜봐야 한다. 어떤 결과든 국정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막장 공격 앞에서 국민들 마음은 어수선하다. 다수 의석을 앞세운 민주당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야당 대표 단식에 정부는 체포동의안으로 응수했다”며 ‘브레이크 없는 폭주’라고 강조했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기는 야당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했듯 21대 마지막 정기국회는 정쟁으로 허비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경제와 안보 상황은 심각하다. 국제유가는 1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플레이션은 가계경제에 깊은 주름을 새긴다. 정치는 국민들 얼굴에 드리운 불안을 씻어줄 책무가 있다. 정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ybs@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