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환원 대표주자 '유한양행'
[한스경제=양미정 기자]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 “건강한 국민만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사회환원과 인재양성에 재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빛을 되찾은 날로부터 78년이 지났다.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한 제약사들은 어느덧 '한 세기' 역사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제의 갖은 핍박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나선 순국선열들, 그리고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애국기업들의 역사도 그만큼 흐른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오로지 광복을 위해 두려움 속에서도 재산과 목숨을 자발적으로 희생했다. 광복절을 맞아 독립정신 하면 떠오르는, 이제는 100년 역사의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두 제약사 '유한양행'과 '동화약품'에 대해 알아봤다.
◇'생명 살리는 물' 활명수로 민족정신 살린 '동화약품'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역사는 동화약품과 함께 시작됐다. 동화약방은 기네스북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이자 제약사, 최초의 등록상표, 등록상품 등 4가지 부문에 등재된 기업이다.
1897년 궁중 선전관이던 동화약품의 창업주 민병호 선생은 국내 최초 양약 '활명수'를 개발했다. 이후 1910년 아들 민강 선생과 함께 동화약품의 전신 '동화약품'을 창업해 활명수를 국민에게 보급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당시 급체, 구토, 소화불량으로 죽어가던 민중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일조했다.
민 부자는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동화약방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망 '서울연통부'를 운영했다. 활명수 판매 이익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 자금으로 활용됐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할 때 신문에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아들 민강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인한 두 차례 옥고로 숨을 거뒀다. 경영이 어려워진 민강 선생의 가족은 민족기업가 보당 윤창식에게 경영권을 인계했다. 다시 태어난 동화약방은 만주에 동화약방 지점을 개설해 해외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활명수는 지금도 전 세계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물'로 불리고 있다. 동화약품은 창업주의 이념을 기리며 활명수 판매 수익금을 물 부족 국가의 식수 정화, 우물 설치, 위생 교육 사업 등에 지원하고 있다. 또 국내에서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기부해 사회 곳곳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보당의 유언에 따라 지금도 다양한 신약 개발 및 사회공헌 활동에 힘쓰고 있다”며 “앞으로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바람직한 경영철학을 통해 국내 최장수 제약기업의 명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환원 대표주자 '유한양행'
유한양행은 10대부터 광복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에 의해 탄생했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4세이던 1909년 한인소년병학교(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다. 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인 대표로 결의문을 낭독했다. 미국 회계사로 근무할 땐 자신의 월급을 털어 독립운동단체에 기부했다.
1926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며 자신의 이름 '유일한'을 딴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국내 제약계를 좌지우지하던 일본 제약사에 맞서 큰 성공을 거둔 유 박사는 1942년 지천명에 가까운 나이에도 재미 한인들로 구성한 무장독립운동단체 '맹호군'을 창설, 3년 뒤 국토수복작전에 참전해 특수훈련을 받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유일한 박사는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한다'는 기업관으로 기업의 이익을 후학 양성과 사회 환원에 일조했다. 또 생활고를 겪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유 박사는 타계(1971년) 전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법인에 기증, 제약계 최초로 '2세 경영'이 아닌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했다. 누구나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을 꿈꿀 수 있는 회사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한양행은 독립유공자 전용 국립묘지인 신암선열공원에서 정기적 봉사를 하는 등 국가유공자 지원 및 독립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학 및 교육사업도 활발히 전개한 유한양행은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회공헌 우수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유한양행의 이윤은 장학금과 복지·교육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립 97주년은 맞은 유한양행은 '국내 매출 1위 제약사'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폐암 치료제 렉라자를 무상 공급하고 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주자라고도 불린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창업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기업가치를 사회와 함께 나누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양미정 기자 ymj@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