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직업 정치인이 아니다. 평생을 수사 검사로 살았다. 여의도 정가는 윤 대통령이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외교를 가장 걱정했다. 다른 분야는 본인 노력과 참모 조언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세 흐름을 파악하고 히스토리를 알아야 하는 까닭에 외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쟁 상대로부터 전문성이 취약하지 않느냐는 견제를 받았다. 윤 대통령은 국정 전반에 걸쳐 속성 과외를 받았다. TV토론회를 거듭하면서 빠르게 현안을 파악하는 모습에서 국민의힘은 안도했다. 하지만 현장 경험이 필요한 외교 분야 검증은 애초부터 한계였다.
취임 이후 새 정부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친북·친중 정책에서 탈피해 한미동맹 복원, 한미일 3국 협력 강화에 나서면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 유엔총회 순방 외교에서 크게 실점했다. 외교 분야에서 총체적 문제점을 노출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조문은 무산됐고 한미와 한일 정상회담은 졸속으로 끝났다. 한마디로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부실했다. 윤 대통령이 출발하기 전에 잔뜩 기대를 부풀게 했던 대통령실 발표를 감안하면 낯 뜨거울 정도다. 국민들은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도체와 전기 자동차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일본과는 관계 정상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순방 외교는 참사에 그쳤다. 무엇보다 순방 성과가 미흡했다. 한미 정상 간 짧은 만남은 민망했다.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행사장에서 나눈 대화는 48초에 불과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 ‘반도체 과학법’과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에 따라 한국 반도체와 자동차산업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관련 업계는 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주길 기대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한일 정상회담은 저자세 논란을 불렀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국기도, 탁자도 없는 사무실에서 30분 회동했다. 회담 형식을 놓고도 우리는 ‘약식 회담’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간담’이라며 격을 낮췄다.
저자세 논란은 우리 정부가 자초했다.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출발에 앞서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일본 정부는 극구 부인했다. 기시다 총리는 뉴욕 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결정되지 않은 소리 하지 마라, 거꾸로 안 만나겠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조율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외교 관례를 깬 꼴이 됐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끌려 다니며 빌미를 줬다.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저자세 외교 원인을 제공을 했다며 책임론을 주장했다. 섣부른 발표 소동만 없었다면 내실 있는 관계 진전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아쉬움이 크다.
사실 한미 정상회담은 애초부터 쉽지 않은 외교 현안이다.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잉크도 마르기 전에 IRA 개정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글로벌 현안도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미국 정부가 흔쾌히 응했다”고 했다. 앞서 대통령실은 엘리자베스 여왕 조문은 교통체증 때문에 무산됐다고 해명했다. 조문을 목적으로 방문하고도 교통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해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까지 불거지면서 외교 참사를 불렀다. 유엔총회 외교를 통해 국익과 국격 향상을 기대했던 국민들로서는 어처구니없다.
새 정부는 ‘자유와 연대’(외교), ‘담대한 구상’(대북 로드맵), ‘그랜드 바겐’(한일관계 개선)을 외교정책으로 내걸었다. 한데 구호만 요란할 뿐 정교한 전략은 미흡하다. 이쯤 되면 외교 정책과 외교라인 전면 교체해야 한다는 야당 주장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국가안보실 인적 구성은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에 편중된 나머지 북한·일본·중국 전문가는 전무하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있다 보면 편향동화와 확증편향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단명한 이유 또한 ‘에코챔버(반향실)’에 갇혀 끼리끼리 편향동향와 확증편향을 강화한 때문이다. 외교는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분간 유엔총회 순방 외교를 놓고 여의도 정치권은 뜨거운 공방을 주고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윤 대통령은 비속어 발언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받고 있다. 진솔한 사과만이 논란을 잠재우는 길이다. 또 목표했던 외교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외교 라인에서 문제점이 드러난 만큼 후속 절차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개선할 여지를 발견한 것이다. 외교는 다른 분야처럼 머리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국제정세 흐름을 면밀히 주시하고 주요 현안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외교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민주당 또한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외교 실책을 빌미로 공세에 주력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국익과 국격을 챙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ybs@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