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한스경제=이정인 기자]  '국가대표 출신 최초 박사 학위자', '한국 최초 아시아럭비연맹 집행위원 당선.'

최재섭(40) 대한럭비협회 부회장이 보유한 각종 '최초' 타이틀이다. 그는 여느 럭비인과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럭비부를 찾아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돌연 은퇴를 택했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15일 서울 럭비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최재섭 부회장은 "럭비계에 계속 있고 싶어서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부상도 있었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것보다 다른 분야에서 럭비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한국 럭비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최 부회장은 럭비계 소문난 '학구파'다. 선수 생활을 접은 뒤 운동장을 달리는 대신 딱딱한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했다. 연세대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스포츠심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 연세대 스포츠과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행정 경험도 쌓았다. 대한럭비협회 선수위원장과 국제위원장을 역임했다. 2015년엔 아시아럭비연맹 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현재는 아시아럭비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심판위원장을 맡고 있다. 

럭비계의 '브레인'으로 통하는 최 부회장은 지난해 출범한 24대 대한럭비협회 집행부에서 '일꾼' 노릇을 한다. 남다른 럭비 사랑을 자랑하는 최윤(59) 회장을 보좌하며 최전선에서 럭비계 실무를 챙긴다. 최 부회장은 "최윤 회장은 모기업 일로 바쁘신 와중에도 협회에서도 책임 경영을 하시려 한다"며 "저에게 일부 권한을 위임해주셨다. 회장님과 가까이서 의견을 나누면서 럭비 발전을 위한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한국 럭비는 2020 도쿄올림픽 출전하고, 2021 아시아 럭비 세븐스 시리즈(이상 7인제)에서 17년 만에 럭비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냈다. 국제 무대에서 호성적을 내면서 '인지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최 부회장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많은 분이 럭비라는 스포츠를 인지한 게 우리에겐 큰 모멘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인지 스포츠가 됐고 인기 스포츠로 발전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은 여전히 럭비의 변방이고, 불모지다. 럭비협회는 국내 럭비 저변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청소년 대상 럭비 특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태그 럭비(신체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 안전한 형태의 럭비)를 보급하는 등 꿈나무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또 럭비 대중화를 위해 유튜브 계정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럭비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웹툰과 동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최 부회장은 "24대 집행부 취임하기 전까진 유아 럭비, 아동 럭비, 초등 럭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저변 확대 프로그램으로 럭비를 보급해 많은 사람이 럭비를 경험하게 하고 있다"며 "다양한 형태의 럭비를 다양한 분들이 즐기고 소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꾸준한 저변 확대 노력, 럭비 홍보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강조하는 건 럭비의 '교육적 가치'다. "럭비는 신사적이고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스포츠다. 위험하고 과격한 스포츠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협동, 희생, 결속력, 팀워크가 중요한 종목이다"라고 강조했다.

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최재섭 대한럭비협회 부회장. /임민환 기자

럭비 경기 종료를 ‘노 사이드’(No Side)라고 한다. 경기 중엔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네 편, 내 편이 없다는 뜻이다. 스포츠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어떤 이들은 '상남자의 스포츠'라고 말하지만, 사실 럭비는 가장 신사적인 스포츠다. 최 부회장은 "럭비는 신체 접촉이 많은 스포츠여서 규율이 엄격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규칙을 지키면서 페어플레이를 한다"며 "심판의 권위도 존중한다. 럭비에서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 거의 볼 수 없다. 상대 선수와 심판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스포츠다. 럭비의 이런 교육적 가치들이 사회와 학교에 전파됐으면 한다"고 힘줬다.

협회는 국제 경쟁력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꾀하고자 '코리안 럭비리그'를 개편했다. 단기간 짧은 토너먼트 대회에서 탈피해 리그 방식을 도입했다. 실업부와 대학부로 나눠 팀당 6경기씩 대회를 치른다. 최 부회장은 "선수가 부족해서 한 팀이 참가를 포기하면 정말 1년에 몇 경기 하지 않고 시즌이 끝나버리곤 했다. 예전에는 단기 토너먼트 식이었다면 이제는 주말에 정기적으로 경기를 뛸 수 있게 했다. 예측할 수 있는 일정과 최대한 많은 경기 수를 보장하려 했다"며 "궁극적인 목표는 팀들이 선수단 규모를 늘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국내외 선수들을 대상으로 트라이아웃을 개최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황무지에 뿌린 씨앗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최 부회장을 비롯한 럭비인들은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처음 월드컵에 출전한 게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에요. 당시 한국은 헝가리에 0-9로 패하고 1승도 거두지 못했죠.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약 50년 뒤인 2002년에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 신화를 썼어요. 2012 런던 올림픽에선 동메달도 땄고요. 한국 럭비는 2020 도쿄올림픽에 출전해서 도약의 신호탄을 쐈다고 생각해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한국 럭비에도 언젠가는 영광의 날이 올 것으로 믿어요.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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