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선점 경쟁 속 韓 입법 지연…"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장사" 현실화 우려
|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서울 광장시장에서 30년째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김모(58)씨는 요즘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을 쉰다. "손님들이 현금은 안 쓰잖아요. 카드로만 결제하는데 한 달에 카드 수수료만 150만원씩 나가요. 마진이 얼마나 남는다고···."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소상공인 3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8명(78.7%)이 현재 신용카드 수수료를 최소 0.5%포인트(p) 이상 더 내려야 한다고 답했다. 카드 수수료는 소상공인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세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약 305만개 영세·중소 가맹점의 카드 수수료를 낮춰 연간 3000억원 규모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발표했다. 연매출 3억원 이하 영세 가맹점의 신용카드 우대수수료율은 0.40%까지 내려간다. 하지만 연매출 10억~30억원 규모의 중소 가맹점은 여전히 1.45%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게다가 수수료 재산정 주기가 3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면서 앞으로 수수료 인하 논의 자체가 뜸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카드사·밴(VAN)사·PG사 등 중간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결제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소상공인의 부담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가격이 들쑥날쑥하지 않고 원화와 1대 1로 가치가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쉽게 말해 '디지털 지갑에 담긴 1만원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객이 물건값을 지불하면 그 돈이 카드사나 은행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게 주인의 디지털 지갑으로 들어간다. 카드사·밴사 등 중개 기관이 사라지니 수수료도 거의 제로(0~0.1% 미만)로 떨어진다. 구글 클라우드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대규모 결제를 처리하는 기업이 결제 수수료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주당순이익(EPS)이 40% 이상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수수료 절감만큼 중요한 게 정산 속도다. 지금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돈이 가게 주인 통장에 들어오기까지 보통 2~5일(영업일 기준)이 걸린다. 하루하루 자금을 굴려야 하는 영세 자영업자에게 이 며칠은 큰 부담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결제 즉시 판매자의 지갑에 돈이 들어오는 'T+0 정산'을 구현한다. 단기 유동성 부족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거래 내역이 블록체인에 영구적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소상공인이 자기 매출 데이터를 직접 소유할 수 있다. 결제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고 설령 결제 서비스가 중단되더라도 디지털 자산과 매출 기록은 그대로 남는다.
연매출 10억원 규모의 중소 가맹점이 신용카드로 결제받으면 평균 1.45%의 수수료를 내야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0~0.1% 미만이다. 연간 1450만원을 내던 것이 거의 제로로 떨어지는 셈이다. 정산은 2~5 영업일에서 즉시 입금으로 바뀌고 매출 데이터는 결제사 시스템에 갇혀 있던 것에서 소상공인 완전 소유로 전환된다. 수백만원을 들여 설치한 POS 시스템이 결제사 정책 변경으로 무용지물이 될 위험도 사라진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술이 있는데도 국내 도입은 더디기만 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은행이다. 한은은 민간 기업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민간이 함부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찍어내면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통화정책 효과가 떨어지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해외로 대량 유출되면 통화 주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
또 자금세탁이나 불법 외환거래에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금융 당국 역시 민간 중심의 결제 시스템은 공공성이 약해지고 규제 회피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신중론이 지나치게 오래 이어지면서 한국만 뒤처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은 벌써 인공지능(AI) 기반 미래 결제 인프라를 선점하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업계에서는 "국내 입법이 늦어지면 나중에는 우리 소상공인들이 원화가 아니라 달러나 엔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장사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기술적 진입장벽도 있다. 블록체인이니 디지털 지갑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은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여전히 어렵다. KT는 현재 1200개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생성형 AI 활용법이나 온라인 판매 전략 등을 가르치고 있고 신한은행도 법률·세무·상권 분석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지만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스템 운영이나 디지털 자산 관리, 보안에 대한 맞춤형 교육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전통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새로운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쓸 수 없으면 소용없다"며 "정부가 나서서 교육하고 시스템을 보급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빅데이터, 블록체인, AI를 중심으로 플랫폼 경제를 활성화하고 핀테크와 스마트공장 등 8대 선도사업에 향후 5년간 9조~1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블록체인 기술 개발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23년 81억원이었던 블록체인 기업 육성 예산이 2024년에는 39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깎였다.
가장 시급한 건 법 정비다. 현재 가상자산 관련 법은 1단계인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만 시행되고 있을 뿐 스테이블코인을 누가 어떻게 발행하고 유통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2단계 입법인 '가상자산 기본법' 또는 '업권법'이 통과돼야 구체적인 틀이 잡히는데 이 논의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이제 우리도 신속히 업권법을 제정하고 정부가 '가상자산 산업을 전면 육성·진흥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국회 세미나에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위해서는 큰 그림의 청사진 마련과 함께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실험이 병행돼야 한다"며 "한국은행의 우려를 해소하면서도 혁신을 허용하려면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은행이나 공적 기관이 연계된 모델을 시범 도입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지금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골든타임'이다. 소상공인의 희망이 좌절되지 않으려면 규제와 진흥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경고했다.
전시현 기자 jsh418@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