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 | 명문대 출신에 정부 고위직 아들이라는 배경은 정식에게 든든한 방패였지만, 동시에 무거운 족쇄였다. 대기업 샐러리맨의 일상에 회의를 느낀 그는 결국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공허했고, 아버지의 은근한 기대와 세상의 시선은 정식의 어깨를 짓눌렀다.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할 돌파구가 절실했다.
그런 그의 앞에 기적 같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월 급여 1000만원. 놀랍도록 파격적인 조건에 정식은 주저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였다. 일이란 고작 통장을 하나 만들어 회사에 제공하고, 그 통장에 입금된 돈을 현금으로 인출하여 전달하는 것이었다. 물론, 추가 조건이 있었다. '운영 자금' 명목의 투자금 1억원. 퇴직금 5000만원에 대출 5000만원을 더해 1억원을 만든 정식은 자신을 믿으며 이 달콤한 유혹에 선뜻 응했다. 그의 전 재산이자 마지막 승부수였다.
며칠 후 정식의 통장은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시로 입금되는 거액을 찾아 회사에 전달하는 그의 일상은 다소 찜찜하기는 했지만, 월 1000만원이라는 보상이 주는 기대감은 모든 의혹을 덮었다. ‘이 정도 노력 없이 고수익을 바랄 수는 없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는 한 달 남짓 그 ‘일’에 충실했다. 매일 은행과 회사 사이를 오가던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피의자로 출두하라는 경찰서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경찰은 그에게 ‘조직원’이라는 냉정한 호칭을 붙였다. 정식은 자신이 제공한 통장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현금 수거 창구로 사용되었으며, 그가 인출해 전달한 돈은 모두 피해자들의 피 같은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금융 지식과 배경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통장의 잔고를 스쳐 지나간 1000만원의 급여가 아니었다. 미래를 위해 투자했던 1억원은 회수하기는 커녕 범죄자금으로 인식되었고, 자신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사기 공범'이라는 붉은 낙인이 찍혔다. 허황된 꿈을 좇은 대가는 전과자라는 오명과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정식은 그날, 천만 원의 꿈만 잃은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신뢰와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취업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진행되는 것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당신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전화는 걸려오지 않는다.
전유문 오코글로벌 대표, 전 KB국민은행 지점장, 채권시장협의회 회장
전유문 대표 gentlemu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