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끝났다. 회의장을 메운 화두는 ‘AI’와 ‘지속가능성’이었지만 정작 금융권과 산업계의 시선을 붙잡은 단어는 따로 있었다. 가상자산.
그동안 APEC 무대는 기술혁신이나 공급망 안정 같은 실물경제 중심의 논의에 머물렀지만, 올해는 달랐다. 디지털경제와 블록체인, 스테이블코인이 공식 세션과 부대행사 곳곳에서 등장했다.
오경석 두나무 대표는 퓨처테크 포럼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블록체인은 이제 실험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입니다. 신뢰는 더 이상 정부나 은행이 독점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현장에 있던 각국 인사들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신뢰의 주체가 기관에서 코드로 옮겨가고 있다는 인식은 금융의 중심이 기술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실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싱가포르는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국가 결제망에 시범 적용했고 일본은 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했다. 호주와 홍콩은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실험을 공공 인프라로 확장 중이다. 반면 정부는 여전히 투기 위험과 시장 불안정성을 이유로 제도화 논의에 선을 긋는다. 금융당국의 시선은 여전히 투자자 보호에 머물러 있고 산업 경쟁력은 논의의 뒷전이다.
이번 APEC 정상선언문에는 가상자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 등장한 표현이 있다. '디지털 신뢰'와 '혁신금융 생태계'. 표현은 완곡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세계는 이미 가상자산을 제도권 금융의 한 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선택이다. 세계 각국이 새로운 금융질서를 설계하는 동안 정부는 여전히 시기상조를 반복한다면 우리는 판 밖의 관찰자가 될 뿐이다. 가상자산은 더 이상 투기의 부산물이 아니다. 통화주권, 자본 흐름, 국가 신뢰의 문제다.
경주에서 시작된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출발점이다. 세계는 이미 새로운 금융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 지도 위에 한국의 이름이 남을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전시현 기자 jsh418@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