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치맥 '깐부회동'으로 화제…단일국가에 최대 규모 GPU 공급
현대차, AI 대전환으로 ‘피지컬 AI’ 시대 선도 목표
엔비디아 생태계 종속성 확대 불가피…정부, 투트랙 전략 추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광장에서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GeForce Gamer Festival); 엔비디아 PC 게임 페스티벌에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강남 모처 ‘치맥 회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호형 기자 leemario@sporbiz.co.kr 2025.10.30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광장에서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GeForce Gamer Festival)에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강남 모처 ‘치맥 회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호형 기자 leemario@sporbiz.co.kr 2025.10.30

| 한스경제=석주원 기자 | 지난 1일 폐막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주인공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아닌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였다.

지난달 30일 젠슨 황 CEO와 이재용 삼성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깐부회동’은 순식간에 전 미디어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점령하며 수많은 게시글과 밈을 만들어 냈다. 다음날 발표된 엔비디아와 국내 정부 및 기업들의 파트너십 체결은 이번 APEC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될 만큼 파격적이었다.

젠슨 황 CEO는 한국 정부,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자동차, 네이버클라우드에 인공지능(AI) GPU 26만장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엔비디아가 단일 국가에 약속한 최대 규모의 GPU 공급이다. 외신에서는 이번 발표를 단순한 반도체 거래가 아니라 미·중 기술 갈등 속에서 미국이 동맹국을 통해 AI 패권을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젠슨 황은 한국 방문 중 “한국이 지금의 엔비디아를 있게 했다”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의 PC방 산업과 e스포츠의 폭발적 성장은 고성능 그래픽카드 수요를 극적으로 확대했으며 이 시기 엔비디아는 한국 시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젠슨 황은 지난 1996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화도 공개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물론 이번 한국과 엔비디아의 파트너십이 단순히 젠슨 황이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어서 성사된 것은 아니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AI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소프트웨어, 기술적·과학적 역량, 제조 역량이 모두 필요한데 미국은 소프트웨어에 강하지만 제조업이 약하고 유럽은 반대로 제조업이 강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약하다. 한국은 이 두 역량을 모두 갖춘 유일한 국가다”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역량으로는 네이버, 카카오, SK텔레콤 등이 개발한 AI 기술, 특히 한국형 소버린 AI 모델 개발력을 갖고 있다. 과학적 역량으로는 고급 인력 수급 능력과 AI 연구개발 기반의 우수성이 있으며 제조 역량으로는 삼성(반도체), 현대차(자동차), SK(화학, 반도체), 조선, 로봇 산업 등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 ‘피지컬 AI(Physical AI)’, 즉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지능형 시스템이 탄생한다.

가장 많은 6만장을 배정받은 네이버는 플랫폼 기업으로서 독립적인 AI 인프라를 구축할 능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젠슨 황 CEO는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을 직접 만나 이번 협상을 성사시켰다. 네이버는 ‘소버린 AI 2.0’을 추진 중이다. 1.0이 언어모델 중심이었다면 2.0은 반도체, 조선, 에너지 등 한국의 전략 산업에 AI를 내장하는 산업 AI 전환을 의미한다.

네이버는 수직형 AI 솔루션을 개발하기 위해 엔비디아의 옴니버스(Omniverse) 및 아이작 심(Isaac Sim) 같은 3D 시뮬레이션 플랫폼과 결합을 추진한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이 인프라를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의 제조 기업들에 개방해 한국 산업 전체의 AI 전환을 주도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는 한국 정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에 네이버클라우드가 선정된 것과도 연결된다. 네이버는 정부 자금으로 한국형 LLM을 개발하고 이번 엔비디아 GPU로 이를 활용한 산업 솔루션을 개발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확보한 5만장은 반도체 제조 공정의 AI 팩토리 구축에 집중될 전망이다. 삼성은 엔비디아의 라이브러리를 통해 반도체 미세 패턴 설계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엔비디아 옴니버스 기반의 디지털 트윈을 구축해 삼성의 세계 각지 반도체 제조 시설을 가상으로 재현하고 실시간 예측 유지보수와 자동화를 구현하면 개발 주기를 단축시키고 수율을 높일 수 있다.

AI 개발에 필요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개발에서도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중요하다. 삼성전자 HBM4는 아직 엔비디아의 기술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AI 기반의 반도체 공장을 구축하면 차세대 HBM 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와의 상호 협력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SK는 제조용 AI 클라우드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5만장을 배정받았다. SK의 전략은 이 플랫폼을 SK하이닉스(메모리칩), SK이노베이션(에너지), SK텔레콤(통신) 등 그룹 계열사뿐 아니라 한국의 중소 제조사와 스타트업에 개방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제조 산업 전반의 AI 전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SK는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함께 울산에 100MW 규모의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SK는 이 AI 데이터센터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향후 아시아 AI 허브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인데 이번에 확보한 GPU는 여기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엔비디아와의 파트너십에 있어 또 다른 주역으로 꼽힌다. 국내 제조업의 핵심 기업인 현대자동차는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GPU 5만장을 확보함으로써 AI 스마트팩토리 전환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엔비디아 옴니버스를 활용한 디지털 트윈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자율주행 개발에도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엔비디아는 지난 8월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플랫폼 ‘DRIVE AGX Thor’의 개발 키트를 공식 발표했는데 이 개발 키트는 이번에 엔비디아가 한국에 공급하기로 한 블랙웰(Blackwell) 아키텍처 GPU를 기반으로 동작한다. 현대자동차의 주행 기술과 엔비디아의 AI 두뇌가 만나 자율주행 개발에도 진척이 기대된다.

피지컬 AI의 최종 목표 중 하나인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2021년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보스턴 다이나믹스는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차는 AI와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을 연결한 스마트팩토리 구축에 이르기까지 피지컬 AI를 위한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현대차는 엔비디아와 함께 피지컬 AI 공동 개발에 3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하며 AI 혁신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세웠다.

정부가 확보한 5만장은 국가 AI 클라우드센터와 소버린 AI 개발에 투자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한국의 모든 스타트업, 학교, 정부 연구기관이 사용할 수 있는 공공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민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기 개발 단계의 스타트업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가 추진 중인 한국형 LLM, 멀티모달 모델, 액션 모델 개발에도 필수적인 학습 인프라를 제공할 계획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악수 나누는 이재명 대통령./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악수 나누는 이재명 대통령./연합뉴스

엔비디아는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향후 확장될 ‘쿠다(CUDA)’ 생태계의 기반을 만든 것으로 분석된다. 쿠다는 엔비디아 GPU에서도 동작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AI 기업들이 엔비디아 칩에 종속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엔비디아는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한국의 쿠다 종속성을 강화하고 한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향후 전 세계 기술 표준을 주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AI GPU 생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HBM을 독점적으로 확보함으로써 후발 주자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종속성을 벗어나기 위해 독자 AI 칩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HBM 공급망을 확보해 경쟁 우위를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현재 HBM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3사가 시장을 나누고 있다. 지상조사기업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62%, 삼성전자가 17%, 마이크론이 21%로 한국 기업이 약 80%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한국산 HBM을 독점할 수 있다면 후발 주자들의 경쟁력을 억제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의 행보가 미국의 동맹국 중심 기술 공급 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엔비디아는 한국에 앞서 영국에 12만장, 독일에 10만장의 GPU를 공급하기로 약속했으며 향후 일본, 싱가포르 등에도 추가 공급이 예상된다. 중국 등 적대적 국가에 대한 수출을 차단하는 대신 동맹국들에게 대규모 GPU를 공급함으로써 엔비디아가 사실상 미국 진영의 기술 대사 역할을 한다는 분석이다.

이번 파트너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세계 3위 수준의 GPU를 확보함으로써 AI 산업 육성에 탄력을 받는 대신 엔비디아 종속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국내 AI 칩 개발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일부 대기업에 AI GPU가 집중되면서 산업별 불균형에 대한 비판도 피할 수 없다.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비서관은 “AI 학습을 위해서는 많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미래를 위해 국내 AI 반도체의 내재화 역량을 키우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투트랙 전략으로 갈 것”이라며 “오히려 우리가 많은 GPU를 확보함으로써 강력한 AI 모델을 만들어 여러 산업 현장에서 AI가 확산되면 이때는 국내 기업들의 NPU 수요도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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