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만으론 부족"…삼성 노조, '주식 보상' 정면 요구
해외는 '미래가치' 보상, 한국은 '단기 실적' 급급
|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이 기술 경쟁을 넘어 '인재 확보전'으로 번지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핵심 기술을 보유한 엔지니어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 내부에서는 기존의 보상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기업과 직원 간의 역학 관계, 이른바 '갑을(甲乙) 구도'까지 바뀌는 모습이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는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정현호 부회장, 전영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 등 최고경영진에게 '성과연동 주식보상제도'에 대한 개선과 설명을 요구하는 공식 공문을 전달했다. 노조 측은 공문을 통해 현재의 보상 체계로는 글로벌 경쟁사에 핵심 인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드러내며 장기적인 성장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주식 보상 제도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노조의 움직임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파격적인 인재 영입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맹추격하고 있는 미국의 마이크론은 물론 파운드리 최강자 대만의 TSMC와 CPU 절대강자 인텔 등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 인상과 함께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RSU는 회사가 제시한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정해진 시점에 주식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보상 방식으로 임직원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회사 성과와 개인의 보상을 일치시키는 효과가 크다. 당장의 현금 보상보다 미래의 더 큰 가치를 약속하며 핵심 인재들의 발을 묶는 '황금 수갑'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국내 기업 내부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과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높은 수준의 초과이익성과급(OPI)과 목표달성장려금(TAI) 등을 통해 인재 이탈을 막아왔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회사 전체의 실적에 연동되는 방식이어서 개인의 성과나 미래 성장 가능성을 온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지적돼 왔다. 특히 HBM과 같이 특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낸 핵심 인재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여도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해외 경쟁사들이 국내 HBM 전문 인력에게 현재 연봉의 수 배에 달하는 금액과 RSU를 제안하며 노골적으로 이직을 권유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 시장의 후발주자인 미국의 마이크론은 최근 한국 지사를 통해 HBM 설계 및 공정 분야의 경력직 채용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인재를 겨냥해 기존 연봉의 2~3배에 달하는 금액과 수년에 걸친 RSU를 제안하며 사실상 ‘인재 쇼핑’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의 TSMC 역시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고 국내 석박사급 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압도적 1위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과 HBM 생산 능력 확보를 위해 인재 영입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전통의 강자 인텔 또한 자체 HBM 개발 및 생산을 선언하며 한국의 우수 엔지니어들에게 높은 수준의 연봉과 보너스, RSU를 포함한 보상 패키지를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래 가치’를 약속하며 국내 핵심 인재들의 이직을 유도하고 있다.
한 반도체 전문 헤드헌터는 "최근 마이크론이나 인텔 등에서 국내 HBM 인력에 대한 영입 문의가 급증했다"면서 "이들이 제시하는 조건은 단순히 연봉 2~3배 수준을 넘어 수년에 걸쳐 수십억 원에 달하는 가치의 RSU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이는 사실상 '인재를 사온다'는 개념에 가깝다“며 "과거에는 회사가 '갑', 직원이 '을'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제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을 가진 핵심 엔지니어가 오히려 '슈퍼을'의 지위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지난해부터 임원급에게만 적용하던 RSU를 우수 인재인 기술사무직 직원에게까지 확대 적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당장의 인재 유출을 막는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K-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인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회사 전체의 성과에 대한 보상과 별개로 개인의 역량과 성과에 기반한 맞춤형 추가 보상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팀이나 사업부의 성과를 넘어 개별 엔지니어의 독보적인 기여를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 유연한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경영진에 주식 보상 제도를 요구하고 나선 것 역시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초격차 기술력을 유지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K-반도체 기업들의 '보상 시스템 대수술'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인재 전쟁은 단순히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 기술 패권 경쟁의 대리전 양상”이라며 우리가 양성한 최고급 두뇌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K-반도체의 기술 생태계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기업은 단기적인 비용 증가를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보상책을 마련해야 하고, 정부 또한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을 통해 기업의 인재 투자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예인 기자 yi4111@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