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스테이블코인 USDT, 아르헨·베네수엘라서 '제2의 기축통화' 급부상
미국 제재 우회부터 급여 지급까지…"디지털 금융 식민지화" 우려
|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홍콩이 지난 1일 아시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라이선스 제도를 본격 시행했다.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 하이퍼 인플레이션 국가에서 테더(USDT) 거래가 폭증하며 통화 대체 현상이 일어났듯이 홍콩의 스테이블코인 합법화는 디지털 달러 제국주의를 가속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홍콩금융관리국(HKMA)은 "암호화폐 허브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며 50여개 기업의 라이선스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 달러의 디지털 확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게 지배적 의견이다.
한때 영국 파운드의 금융 전초기지였던 홍콩이 이제는 미국 달러의 디지털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통화주권에도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남미發 '테더 혁명'···자국 통화 버리고 달러 코인 선택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전문 기업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실제로 전문가들의 이런 우려는 이미 지구 반대편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남미 국가들에서는 자국 통화 대신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의존하는 통화 대체 현상이 급속히 확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 한 카페에서 직장인 마리아(가명·32)는 점심값을 현금이나 카드 대신 휴대폰 속 테더(USDT)로 결제한다. 그는 "페소로 받은 월급을 바로 테더로 바꿔놓지 않으면 하루가 다르게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런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연 인플레이션율이 20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자국 통화 페소 대신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일상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가 1인당 월 외화 거래 한도를 200달러로 제한하면서 시민들은 규제를 피해 USDT를 통해 달러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은 전년 동기 대비 300% 이상 급증했다. 테더 거래 비중이 전체 가상자산 거래의 70%를 넘어서면서 사실상 '제2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급여를 USDT로 받는 직장인들도 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IT 기업 직원 후안 로페스(가명·28)는 "회사에서 월급의 70%를 테더로 지급한다"며 "페소로 받으면 다음 달엔 실질 구매력이 반토막 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보다 더 극단적인 상황은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연 인플레이션율이 400%를 넘나드는 가운데,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영기업까지 테더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PDVSA)는 올해부터 원유 수출 대금의 절반을 USDT로 선불 결제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일반 은행 거래가 차단된 상황에서, USDT를 통해 국제 거래를 지속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 정부 자료에 따르면 PDVSA의 가상자산 거래 규모는 지난해 기준 210억 달러(약 29조원)에 달한다. 이는 베네수엘라 연간 GDP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일반 시민들의 USDT 의존도는 더욱 심각하다.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는 카를로스 모랄레스(가명·45)는 "손님들이 기름값을 USDT로 내는 경우가 전체의 40%가 넘는다"며 "정부가 발행하는 볼리바르보다 USDT가 더 믿을 만한 돈이 됐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시민들은 급여부터 생필품 구매까지 모든 경제활동을 USDT로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카라카스 시내 한 마트에서는 계산대마다 USDT 결제용 QR코드가 붙어있고 직원들은 실시간 환율을 확인하며 USDT 가격을 계산해준다.
젊은 세대일수록 테더 의존도가 높다. 대학생 루이사 고메스(가명·22)는 "용돈부터 등록금까지 모든 걸 USDT로 받는다"며 "볼리바르는 받자마자 휴지조각이 되는 돈"이라고 귀띔했다.
◆ 한국도 위험 신호···통화주권 방어 전략 시급
이런 남미 사례들이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5대 거래소의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81조원을 넘어서며 전년 동기 대비 188% 급증했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국내 투자자들의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선호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행은 지난달 31일 금융결제국 내 가상자산반을 긴급 신설하고 기존 디지털화폐연구실을 디지털화폐실로 확대 개편했다. 가상자산반은 6명 이내 규모로 구성되며 스테이블코인 관련 정책 논의 대응과 입법 과정에서 정부·국회와의 협력 업무를 전담한다.
한은 관계자는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처럼 자국 통화가 스테이블코인에 대체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불가피하다"면서도 "다만 민간이 사실상 화폐를 발행하는 셈이어서 통화정책 혼선과 금융시스템 불안정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시대 금융 혁신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국내 디지털자산 커스터디(수탁) 전문 기업 비댁스 전략기획실 김보군 실장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없이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의존도만 높아질 것"이라며 "하지만 발행 주체를 엄격히 제한하고 준비자산 관리를 투명하게 해야 제2의 테라·루나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하락 상황에서는 자산 방어 수요가 자연스럽게 USDT, USDC 같은 접근성과 유동성이 높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다만 현재 우리나라는 원화 기반 결제 시스템이 잘 발달돼 있고 외환 규제가 엄격해 아르헨티나와 같은 급격한 통화 체계 변화는 예상하기 어렵다"면서도 "오히려 USD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대응해 KRW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해 글로벌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현 기자 jsh418@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