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섬나라가 이끈 역사적 판결
인과관계·책임소재 입증 논란 불가피
| 한스경제=이성철 기자 | 유엔 최고 사법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모든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설정할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국제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기존의 도덕적 의무 차원이 아닌 실질적 책임 규정 및 법적 의무로 규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전망이다.
AP,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ICJ는 지난 2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에서 만장일치로 "기후변화 대응 미흡은 국제적으로 위법한 행위가 될 수 있으며 그 피해를 입은 국가는 원상회복·금전 배상, 명예회복 등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권고적 의견을 내놨다.
다만 국가 간 배상 조건을 '불법 행위와 피해 사이에 충분히 직접적이고 확실한 인과관계가 제시되는 경우'로 명시했다.
이와사와 유지 ICJ소장은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은 인권"이라며 각국이 2015년 파리협정 가입 여부와 무관하게 기후 시스템을 보호할 국제법상 의무를 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온실가스 배출은 명백히 인간 활동에 의해 발생하며 이는 특정 영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며 "역사적으로 산업화된 부유한 국가들이 대부분의 배출 책임이 있다며 이들이 문제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CJ는 특히 국가가 자국 내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을 통제하지 않거나 화석연료 산업을 보조·승인할 경우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권고적 의견'은 판결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국 법원과 국제법 재판소의 법적 판단, 국제사회 외교 협상에서 중대한 고려 사유로 적용된다.
이번 판결은 바누아투와 통가 등 남태평양의 침수 위기에 놓인 섬나라들이 주도한 결과다.
바누아투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국가 수몰 위기가 오염 물질 배출로 기후 변화를 초래한 선진국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유엔은 2023년 ICJ에 공개 심리를 요청함으로써 이번 국제적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영국의 런던정경대 산하 그랜섬 기후환경연구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기후 관련 소송은 60개국에서 3000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번 권고에 따라 향후 온실가스 배출 상위 국가들을 상대로 한 국제 소송이 본격화될 전망으로 주요 선진국들이 ICJ 피소와 손해배상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의견으로 기후변화 책임을 두고 '누가, 얼마만큼의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는가'’라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또한 배상을 청구하려면 상대국이 ICJ 관할권을 수락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해 온 미국과 중국은 정작 그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과 함께 양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파리협정에서 탈퇴했다.
이밖에도 주요 선진국들은 온실가스 감축 및 기후위기 대응을 명시한 '파리협정'을 포함한 기존의 기후 협약으로 충분하고 추가적인 법적 의무를 부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리협정은 2100년까지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대비 2도 이내로 제한하고, 1.5도 이내로 낮추기로 노력한다는 추가 목표를 정한 상태다.
이와 관련 국내 기후변화 싱크탱크인 플랜 1.5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국가의 법적 의무와 책임을 분명하게 밝힌 이번 권고적 의견을 환영한다"며 "우리는 국회와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을 충실하게 수용해 기후위기로부터 국민과 인류의 권리를 충실하게 보호하고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관련된 법률적·외교적 분쟁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성철 기자 leesc@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