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이 치열하다. / 연합뉴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이 치열하다. / 연합뉴스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AI(인공지능) 반도체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 공급과잉 우려가 본격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그동안 HBM 시장을 주도하며 승승장구해온 SK하이닉스가 급격한 주가 조정을 겪는 반면, 후발주자인 삼성전자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NH투자증권은 1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HBM 공급과잉과 가격 하락 우려로 외국인 매도세가 커지며 SK하이닉스 주가 조정폭이 확대됐다"며 "오히려 삼성전자의 저평가 매력이 부각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류영호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시장에서는 2025년 이후 HBM의 공급과잉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며 "미국 반도체 회사인 마이크론 주가 역시 약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연초 대비 82% 급등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최근 들어 급격한 하락세로 돌아섰다. 17일에만 9% 가까이 하락하며 투자자들을 당황시켰다. 골드만삭스가 HBM 공급 과잉으로 가장 타격을 받을 업체로 SK하이닉스를 지목하며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 조정한 것이 결정타였다. 

반면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H20 중국향 판매 재개 소식과 함께 주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가 하반기 출시 예정인 신형 B시리즈와 RTX 6000 시리즈에 기존 HBM 대신 최신 그래픽 메모리 GDDR7이 탑재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삼성전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GDDR7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류영호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HBM이 엔비디아 진입에 성공하면 HBM 시장의 공급과잉 우려가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세계 HBM 시장은 SK하이닉스(점유율 53%)와 삼성전자(38%)가 합계 90% 이상을 점유하는 독과점 구조다. 여기에 마이크론까지 가세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HBM 공급과잉 우려가 커지는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엔비디아가 품질 검증을 통과한 마이크론이 생산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삼성전자도 HBM3E 12단의 품질 검증을 마무리하며 하반기 엔비디아 공급망 진입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공급 물량이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더욱이 AI용 주문형반도체(ASIC)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HBM 수요 구조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브로드컴을 비롯해 아마존과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ASIC 칩 개발에 나서면서 HBM 구매 패턴이 다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존 엔비디아 중심의 HBM 공급 구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류 연구원은 "올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기는 어렵다"며 "가격 협상 결정권이 공급자에서 수요자로 넘어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어 HBM4 가격 인상폭이 시장 예상보다 둔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골드만삭스는 2026년 HBM 가격이 약 10%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단기적으로 삼성전자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HBM 분야에서 SK하이닉스에 밀려 상대적으로 저평가받아왔지만, 최근 AMD와 브로드컴에 HBM3 및 HBM3E 공급을 확정지으며 기술 신뢰도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의 H20 중국 판매 재개가 삼성전자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H20은 엔비디아가 미국의 수출 규제에 맞춰 성능을 낮춰 설계한 중국 전용 AI칩인데, 이 제품에 삼성전자의 HBM3가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수출 통제를 실시한 지 3개월 만에 판매를 다시 허락하면서 삼성전자의 HBM 매출 증가가 기대되고 있다.  

NH투자증권은 "2026년 HBM 물량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불확실성이 지속될 수 있다"며 "최근 삼성전자의 HBM 시장 진입 기대감이 커지면서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단기적으로 삼성전자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류 연구원은 "AI 시장 성장과 HBM 원가경쟁력, 그리고 기술력 측면에서 우위를 갖고 있는 SK하이닉스가 선두적인 입지를 유지할 것이라는 시각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SK하이닉스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2026년 HBM 계약에 대한 일정 수준 확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HBM 시장이 기술 경쟁에서 가격 전쟁으로 전환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공급 부족으로 공급업체가 가격 주도권을 쥐고 있던 HBM 시장이 공급 과잉 국면에 들어서면서 수요업체인 빅테크 기업들의 협상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공급 부족 상황이 해소되고 있다"며 "이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가격 경쟁력까지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2026년부터는 본격적인 가격 경쟁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전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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