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테라·루나 사태로 드러난 구조적 취약성
USDT·USDC도 완벽할 수 없는 구조
디지털 뱅크런에 금융위기 우려 증폭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가 337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6분의 1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했습니다. 미국·EU·일본이 잇따라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을 시행하며 디지털 통화 패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국내도 올 하반기 제도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본지는 디지털 달러의 글로벌 통화패권 재편부터 월스트리트 금융 거인들의 스테이블코인 쟁탈전, 각국의 규제 전략,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가능성과 한계, 디페깅 리스크, CBDC와의 경쟁, 그리고 2030년 미래 시나리오까지 7회에 걸쳐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모든 쟁점을 분석합니다. [편집자주]

이미지=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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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경제=전시현 기자] 1코인은 언제나 1달러라는 약속. 가상자산 시장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스테이블코인의 존재 이유이자, 투자자들이 변동성의 광풍 속에서 찾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이 절대적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약 60조원을 증발시킨 테라·루나 사태부터 스테이블코인 USDC의 일시적 가치 폭락까지, 디페깅(De-pegging·고정가치 이탈)의 공포가 시장 전체를 휘감고 있다. 이는 특정 코인의 실패를 넘어 가상자산 생태계 전반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시스템 위기를 의미한다.

◆ 허술한 알고리즘, 부실한 담보…신뢰라는 이름의 모래성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2022년 5월 한국산 스테이블코인 테라(UST)와 루나(LUNA)의 붕괴다. 테라의 가치는 달러 등 실물 자산이 아닌 알고리즘으로 유지되는 구조였다. 1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자매 코인인 루나를 발행해 테라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가격을 방어했지만 투자자 신뢰가 무너지자 정교해 보였던 알고리즘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폭락은 순식간이었다. 일주일 만에 두 코인은 휴지 조각이 됐고, 특히 2030세대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봤다. 당시 테라 피해자였던 장소라(가명)씨는 "3억원이 3만원이 됐다"며 "알고리즘을 맹신한 것이 실수였다"고 털어놨다.

이 사건은 실물 담보 없이 운용된 스테이블코인이 시장 불안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였다. 당시 피해자 대리인인 한상준 변호사(법무법인 대건)는 "자체 시스템 유지를 위해 투자자들에게 연 19.4%의 고이율을 제시한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테라 알고리즘이 붕괴하면서 루나는 일주일만에 10만원에서 0.5원으로 99.9% 폭락했고, 테라 역시 1달러 밑으로 가치가 하락했다"며 "이 기간에만 국내 투자자 재산 약 48조원이 증발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 가장 안전하다 믿었던 코인마저…SVB 파산에 드러난 새로운 위험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허상이 무너진 자리에, 실물 자산을 담보로 내세운 스테이블코인조차 안전 자산이 아니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테라·루나 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23년 3월, 미국의 대표 스테이블코인인 USDC가 1달러 가치에서 한때 0.87달러까지 급락하며 디페깅 공포를 현실로 끌어냈다.

직격탄의 원인은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이었다. USDC 발행사인 써클(Circle)이 준비금 400억달러 중 33억달러를 SVB에 예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투명한 정보 공개가 패닉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미국 정부가 SVB 예금 전액 보장을 발표하면서 USDC는 하루 만에 1달러 가치를 회복했지만, 이 사태는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이 전통 금융기관의 리스크에 얼마나 깊숙이 연결돼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1달러=1코인'이라는 약속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이 시장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 SNS 타고 번지는 공포…전통 뱅크런보다 빠른 디지털 뱅크런

문제는 이러한 위기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데 있다. 이른바 '디지털 뱅크런'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공황이다.

과거처럼 은행 창구 앞에 줄을 서는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SNS에 떠도는 단 한 줄의 루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글 하나가 시장 전체를 뒤흔든다. 공포에 휩싸인 투자자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앞에서 일제히 자산 인출 버튼을 누르며 '디페깅(가치 이탈)'을 가속시킨다.

물리적 시간의 제약이 사라진 24시간 디지털 금융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유동성을 순식간에 고갈시킨다. 실제로 2023년 USDC 사태 당시에도 시장은 순식간에 반응했다. 발행사인 써클의 준비금 운용에 대한 불신이 번지자 수천만달러 규모의 대량 인출이 이어졌고 써클은 보유 자산의 유동화를 따라가지 못하며 단기적인 가치 붕괴를 피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단지 기술적 일탈이 아닌,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신뢰의 본질을 어떻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러한 공포의 중심에는 여전히 시가총액 1위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가 있다. 테더는 오랜 기간 준비금의 투명성을 둘러싸고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외부의 독립적 감사를 받은 적이 없고, 자산 구성을 분기마다 증명서 형식으로만 공개하는데 그마저도 현금 외에 기업어음, 담보부 대출 등 유동성 리스크가 큰 자산이 포함돼 있다.

업계 관계자는 "1달러와의 1대1 교환을 보장하면서도 위험 자산을 준비금에 포함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며 "신뢰라는 기둥 위에 세워진 스테이블코인이 오히려 그 신뢰 때문에 위기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최근 테더가 미국 검찰로부터 자금세탁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까지 더해지며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한국은행도 "스테이블코인에서 뱅크런과 유사한 코인런이 발생할 경우, 전통 은행보다 훨씬 빠르게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SVB 사태 당시 단 하루 만에 무려 420억달러(약 55조원)의 자금이 인출되며 스마트폰 기반의 초고속 뱅크런이 어떤 위력을 갖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 기술과 제도로 신뢰 되찾을까…투명성과 안전망 구축 시도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시장을 뒤덮은 가운데 스테이블코인 업계는 신뢰 회복을 위한 해법 찾기에 나섰다. 논의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기술적 투명성 확보, 다른 하나는 제도적 안전망 구축이다.

기술적 해법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실시간 준비금 증명(PoR·Proof of Reserves) 시스템이다. 블록체인 기술 기업 체인링크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들이 스테이블코인의 담보 자산 정보를 블록체인과 연동해, 투자자가 언제든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만능은 아니다. 담보 자산 정보 자체의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기술도 무용지물이며 모든 자산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기에는 여전히 기술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만능주의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스테이블코인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의 필요성이 급부상하고 있다. 은행의 예금자 보호제도처럼 스테이블코인 보유자를 위한 안전망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발행사 부도 시에도 투자자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법적 보호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벽도 만만치 않다. 보호 기금 조성에 따른 보험료는 누가 부담할 것인지, 국가가 가치를 보장할 경우 발행사의 도덕적 해이는 어떻게 막을 것인지 등 복잡한 쟁점들이 얽혀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결국 기술과 제도라는 두 개의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만 디페깅의 공포에서 벗어나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며 "어느 한쪽만으론 한계가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전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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