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한계와 한탕주의가 큰 원인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제도권 편입의 첫발을 뗐다. 지난 10일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발의되면서 시장의 기대감이 커지는 한편 한때 국내 시장을 지배했던 국산 가상자산 '김치코인'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투기 심리를 자극하며 우후죽순 생겨났던 김치코인들이 강화된 규제 속에서 설 자리를 잃고 대부분 정리된 셈이다. 한국 가상자산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김치코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28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 등 국내 5대 거래소에서 지원이 종료된 315개 프로젝트 중 96개(30.5%)가 토종 코인이었다. 상당수가 높은 변동성과 투기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 김치코인의 평균 시장 수명은 고작 627.6일,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처럼 극명했던 흥망성쇠의 배경에는 구조적 취약성과 ‘한탕주의’라는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고질적인 병폐가 깊이 도사리고 있었다.
◆ 자전거래 금지가 벗겨낸 연명술의 민낯
김치코인 붕괴의 서막은 지난해 7월 19일 시행된 1단계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시작되면서다. 이 법의 핵심은 자전거래 금지다. 그간 거래소 내부에서 은밀히 이뤄지던 시세조작성 매매는 부실한 김치코인들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주된 통로 역할을 해왔다. 법 시행 이후 '자전거래에 의존해 생명력을 연명하던 김치코인들은 인공호흡기가 제거된 것과 같다'는 냉혹한 평가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실제로 같은 해 하반기, 국산 코인의 상장폐지 비중은 65%로 치솟으며 투자자들의 이탈을 가속화했다.
강성후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KDA) 회장은 ‘김치코인’이 사라진 현상에 대해 “1단계 가상자산법 시행으로 자전거래가 금지되자 시세 띄우기에 의존해 온 코인들은 일제히 퇴출됐다”며 "글로벌 기준 미준수 프로젝트가 대다수였다"고 전했다.
그는 “전체 김치코인의 95%가 쪽박을 찼고 5%만 겨우 수익을 얻는 구조였다”면서 “이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시행되면 백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코인은 극소수에 불과해 시장은 스테이블코인·토큰증권 중심으로 재편될 것”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규제의 여파는 최근의 상장폐지 사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달 국내 대표 김치코인으로 불리던 위메이드의 위믹스(WEMIX)가 국내 주요 거래소에서 두 번째 상장 폐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닥사(DAXA) 출범 후 공동 상폐 결정이자, 재상장 후 다시 퇴출된 첫 사례로 유통량 논란 및 투자자 정보 제공 미흡 등이 주요 사유로 꼽혔다.
이는 규제 당국과 거래소들이 상장 유지 기준을 한층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6월부터 가상자산 거래지원(상장) 모범사례안을 마련해 내달 시행될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과 함께 전 거래소에 적용하고 있으며, 국내 원화마켓 거래소를 포함, 코인마켓 29개 거래소의 600여 종 가상자산이 전면 심사 대상에 올랐다.
◆ 한탕주의가 자초한 자멸의 길, 그리고 변화하는 거래소
자전거래 금지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장에는 단기 차익만을 노린 무책임한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나오며 김치코인의 몰락을 재촉했다. 코다(CODA)의 조진석 대표는 한탕주의에 기댄 김치코인 시장의 붕괴가 결국 예고된 수순이었다며 그 원인을 세 가지 구조적 병폐로 요약했다.
첫째 단기 자금 유치에만 혈안이 된 ‘엉터리 백서’의 난립이 지적된다. 실현 가능성 없는 로드맵을 제시하며 투자자를 현혹하는 행태가 시장의 근간을 허물었다는 분석이다. 둘째, 국내 ICO(가상자산공개) 금지 조치를 회피하기 위해 해외에 서류상 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뒤 주먹구구식으로 코인을 발행한 무책임함도 도마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명확한 기준 없이 ‘고무줄’ 잣대를 들이대 온 거래소의 불투명한 상장 심사와 이를 둘러싼 비리 의혹이 사태를 키웠다. 결국 이러한 총체적 부실은 고스란히 선량한 투자자들의 막대한 피해로 귀결됐으며, 가상자산 시장 생태계의 근간인 신뢰를 뿌리째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다.
거래소들 역시 이 광풍 속에서 뼈아픈 변모를 거듭했다. 초창기, 오직 상장수수료 수입에만 눈이 멀어 부실 코인을 무더기로 받았던 이른바 탐욕의 문지기들은, 잇단 상장폐지와 강력한 규제 압박이 닥치자 돌연 두려움의 문지기로 변신했다. 조 대표는 이들의 과도한 보수성 때문에 “정작 기술력과 사업성을 갖춘 국내 프로젝트마저 고사 위기에 몰렸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현재, 국내 5대 거래소 원화마켓에 남은 국산 토큰은 전체 191종 중 고작 22종(11.5%)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극소수만이 의미 있는 거래량을 유지하며 ‘화이트리스트’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 규제는 이제 시작, K-디지털자산의 미래는
디지털자산기본법에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김치코인 시장에 또 한 번의 거대한 파고를 예고하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기술력과 투명성을 검증받지 못한 코인은 시장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업계에서는 “법적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알트코인은 극소수에 불과해, 시장이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STO)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재 국회에는 민병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계류 중이며, 금융당국 역시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를 본격화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김치코인의 광풍이 남긴 교훈은 뼈아프다. 무분별한 투기와 구조적 부실을 걸러낸 규제는 시장 체질 개선의 중요한 분수령이 됐으나 동시에 ‘진짜 국산 토큰’을 발굴하고 육성할 시스템은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코다 조진석 대표는 “이제는 기술과 사업성 중심의 공정한 심사 체계를 구축하고, 거래소 간 규제 형평성을 확보하는 데 산업계와 정부가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김치코인의 비극은 디지털자산 산업 전반에 또 다른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는 업계 의견이다. 강성후 회장은 “이제 시장의 옥석 가리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며 “기술력과 사업성을 갖춘 진짜 국산 토큰만이 살아남아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현 기자 jsh418@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