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중국發 공급과잉·글로벌 경제 저성장 기조가 주원인
중동산 저가 범용 제품 공세도 ‘시간 문제’
기업, 투자 축소·사업구조 재편·고부가가치 사업 집중
정부, 구제책 발표했지만...‘탄핵 정국’ 변수로 떠올라
석유화학 제품별 중국 자급률 / 사진=한국신용평가 보고서
석유화학 제품별 중국 자급률 / 사진=한국신용평가 보고서

[한스경제=신연수 기자] 석유화학 업계가 올해도 벼랑 끝에 매달린 것처럼 최악의 시기를 보내면서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중국의 저가 물량공세로 시작된 석유화학 제품의 글로벌 공급과잉과 이에 따른 수요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탓이다. 이에 기업들은 획기적인 구조조정과 연구개발(R&D),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을 앞세워 돌파구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기업별 신용등급이 대거 하향되는 등 시장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 중국發 공급과잉...범용 소재 가격 회복 조짐 無

업계는 현재 글로벌 시장 환경 변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중국은 최근 몇 년간 에틸렌 등 석유화학 기초제품 생산 능력을 대규모로 확충하면서 아시아 지역 내 공급 과잉을 초래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공급 과잉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국가 주도로 석유화학 산업에 공격적인 시설 투자를 해 왔다. 특히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 등 범용 소재 자급률이 100% 가까이 늘어났다. 중국은 2014년 1950만t 수준이던 에틸렌 설비 능력을 지난해 5180만t 수준으로 급격히 끌어올렸다. 한국(1270만t)과 4배 이상 차이 난다.

수출도 막힌 상태다. 에틸렌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소재로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 등 국내 기업들의 주 제품이다.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할 때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에틸렌을 중국에 수출해 호황을 누렸지만, 중국의 자급자족 성공과 경기침체로 수요가 줄었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중국 수출 비중은 36.3% 수준이었는데, 이는 2020년 42.9% 대비 6.6%p 감소한 수치다.

에틸렌 가격의 회복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다. 수익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나프타를 뺀 가격)는 2022년 이후 손익분기점인 1t(톤) 당 300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올해 3분기 기준 에틸렌 스프레드는 186.47달러에 그쳤다.

프로필렌도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 올해 3분기 기준 국제 프로필렌 가격은 t당 879.3달러로 2021년부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프로필렌 업황 악화의 원인인 공급과잉이 수년간 더 이어질 것으로 보여 국제 가격도 계속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석유화학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2021년 13.4%에서 지난해 0.6%까지 급락했다. 업계는 2015~2021년 수요와 공급이 적절히 맞아떨어져 수년간 호실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경기침체, 에틸렌 등의 수요가 급감한 상황에서 중국의 물량 밀어내기로 공급과잉이 나타나 수익성이 주저앉은 것이다.

반대로 부타디엔 가격은 높다. 올해 3분기 기준 국제 부타디엔 가격은 t당 1521달러로 전년 동월(1001달러) 대비 52% 상승했다. 부타디엔은 올해 6월부터 t당 1500달러 이상의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부타디엔은 나프타 크래커(NCC)에서 나프타를 분해해 얻는 원료로, 나프타 투입 시 생산량은 10% 미만으로 소량 생산된다. 기업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부타디엔 가격 상승에 힘입어 석유화학사들은 3월 이후 NCC 가동률을 높였다.

다만 부타디엔이 기초유분 제품 가운데 생산 비중이 높지 않아 화학사들 실적에 유의미한 개선이 확인되려면 유럽 제조업 회복 등에 따른 수요 회복이 근본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도 장기 불황에 영향을 주고 있다. 원자재시장 분석업체 ICIS가 지난 9월 석유화학 산업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기초화학 수요는 2017~2020년 3.2% 증가, 2020~2023년 3.0% 증가한 이후 2030년까지 단 2.6%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중동산 범용 소재는 더 큰 암초다. 중동 국가들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석유화학 산업에 진출할 예정이다. 중국보다 더 저렴한 제품을 무기로 삼을 것으로 보여서 국내 기업들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유기업 아람코의 ‘사우디아라비아 얀부 COTC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카타르 라스라판 석유화학 플랜트 ▲쿠웨이트 알주르 석유화학 플랜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미랄 석유화학단지 ▲오만 두큼 프로젝트 ▲아랍에미리트 보루즈4 프로젝트 등이 완공될 예정이다. 총 1123만t, 즉 LG화학의 4배에 달하는 에틸렌이 향후 5년 동안 글로벌 시장에 쏟아진다는 뜻이다.

삼일PwC 경영연구원에 따르면, 내년부터 중동 주요 국가들의 석유화학 공장 6개가 순차적으로 완공된다. 해당 공장들은 현지에서 원유를 조달해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정(COTC, Crude Oil to Chemical)’을 사용한다.

삼일PwC는 “COTC는 원유에서 곧바로 화학제품을 일괄 생산해 생산비와 운송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한다”며 “에틸렌 생산 손익분기점은 한국의 3분의 1 수준인 100달러 이하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가동 본격화 시 범용제품을 중국보다 저렴하게 생산할 것”이라며 “중동산 저가공세는 이제 ‘시간 문제’”라고 강조했다.

LG화학 여수공장 전경 / 사진=LG화학
LG화학 여수공장 전경 / 사진=LG화학

◆ ‘생존 작업’ 펼치는 기업...투자 축소·사업구조 재편

석유화학 업계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투자를 축소하고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등 ‘생존 작업’을 펼치고 있다.

LG화학은 2022년 3월 석유화학 원료로 쓰이는 스티렌모노머(SM)를 생산하는 대산 SM공장을 중지한 데 이어 올해 3월 여수 SM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SM은 가전에 들어가는 합성수지·합성고무 등에 쓰이는 원료다.

또 최근에는 여수공장의 폴리염화비닐(PVC) 생산 라인을 일부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지난해 IT소재 사업부의 필름 사업 중 편광판과 편광판 소재 사업을 중국 기업에 매각하기도 했다. 나프타분해시설(NCC)이 없는 업체들도 상황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롯데케미칼은 최근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1~3공장 가운데 2공장 가동 중단 절차에 들어갔다. 생산 시설을 비우고 질소를 충전하는 이른바 ‘박스업(Box-Up)으로 가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설비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가동이 중단된 곳은 에틸렌글리콜(EG), 산화에틸렌유도체(EOA) 생산 라인이다. 2공장 내 생산 제품 라인이 멈춘 것은 상반기 페트(PET)에 이어 두 번째다.

또 지난 10월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 LUSR의 청산을 결정했고, 공장 가동 최적화 및 원가 절감을 위한 ‘오퍼레이셔널 엑셀런스 프로젝트’를 여수·대산 공장에서 진행하고 있다.

제품 포트폴리오 다각화에도 나서고 있다. LG화학은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기존의 범용제품에서 벗어나 내열성과 유연성이 강화된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일례로 초고중합도 PVC와 같은 스페셜티 제품의 생산 비중을 늘리고 있다. 이 제품은 전기차 충전기 케이블의 소재로 사용될 예정으로, 우수한 난연성 덕분에 고온에서도 안정성이 보장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구조 재편도 적극적이다. LG화학은 경영 불확실성을 고려해 올해 설비 투자를 4조원에서 3조원 초중반 수준으로 줄이고, 기존 자산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전남 여수의 나프타분해설비(NCC) 2공장 매각 등 자산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계획이다.

롯데케미칼도 올해 3조원이었던 설비 투자를 내년에는 1조7000억원으로 대폭 줄일 계획이다. 또한 비효율 자산 매각과 전략적 사업 철수도 진행 중이다. 더불어 기초화학이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2030년까지 30% 이하로 축소할 계획이다. 대신 기능성 제품, 친환경 그린소재 사업, 양극박과 음극박, 수소에너지 등에 집중해 차별화한 스페셜티 제품 확대를 꾀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도 지난해부터 자동차, 타이어 등 전방 시장에서 점진적인 수요 회복세가 관찰되면서 주력인 타이어용 합성고무 사업은 수익성 제고 전략으로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계 최대 생산 능력을 보유한 NB라텍스는 전방의 라텍스 장갑 시장에서 대형 메이커들의 수급 재편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기존 의료용 장갑에서 더 넓은 범위로 품질 다각화와 기술 고도화를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도 불황에 빠진 석화업계를 구제하기 위해 3조원 규모 정책금융 투입 등 부양책을 내놓았다. / 사진=롯데케미칼
정부도 불황에 빠진 석화업계를 구제하기 위해 3조원 규모 정책금융 투입 등 부양책을 내놓았다. / 사진=롯데케미칼

◆ 정부, 석화 업계 구제할 대책 공개...3조원 규모 정책금융 투입

정부도 불황에 빠진 석유화학 업계를 구제하기 위해 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 2일 기획재정부는 업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유지해 오던 나프타 원유 할당관세 0%를 내년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통상 나프타에 적용되던 관세는 3% 정도였는데, 올해와 마찬가지로 관세를 면제하는 안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나프타는 석유화학 제품의 기본이 되는 원재료로 원가의 70%를 차지한다. 나프타 원유 가격에 따라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좌우된다.

기재부는 내년 할당관세 적용에 따른 지원 금액은 6265억원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LPG와 LNG를 합산한 금액이어서 나프타용 원유에만 지원되는 금액은 따로 추산키가 쉽지 않다. 다만 1년간 나프타용 원유에 세금이 감면되면 1000억원 수준의 원가비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아울러 지난 23일 최상목 경제부총리 주재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석유화학 기업들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지주회사 지분 100% 매입을 위한 규제 유예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기업결합심사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조치가 포함된다.

또한 총 3조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융자와 보증 등의 방식으로 제공해 기업들의 사업재편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예정이고, 석유화학 설비 폐쇄 등으로 인한 지역경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산업위기 선제 대응지역’ 지정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영향받는 지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다.

선제 대응지역으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 기업들은 금융·고용안정, 연구개발(R&D), 사업화, 판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맞춤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정책금융기관의 대출 만기 연장, 원금 상환 유예, 국세 납부 기한 연장 등의 혜택도 제공된다.

더불어 석유화학 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스페셜티 제품 개발에 대한 R&D 투자를 확대한다. 정부는 내년 상반기에 ‘2025~2030년 R&D 투자 로드맵’을 수립·발표할 예정으로, 고부가·친환경 화학소재 기술개발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신청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밖에 500억원 규모의 ‘고부가 스페셜티 펀드’를 조성해 국가전략기술 및 신성장 원천기술 발굴 등을 통해 산업의 고도화를 지원한다.

기업들의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도 마련됐다. 석유화학 원료인 납사와 납사 제조용 원유에 대한 무관세 기간을 1년 더 연장하고, 공업원료용 LNG 석유 수입 부과금을 환급해 주기로 했다. 또 에탄 터미널 및 저장탱크 신설에 대해 ‘인허가 패스트트랙’을 적용하고, 분산형 전력 거래 활성화를 통한 전기요금 선택권 확대, 안전 규제 합리화 등의 조치도 함께 추진한다.

정부 관계자는 "석유화학 업계의 자구 노력을 촉진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이번 대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업계의 실제 정책 수요를 바탕으로 내년 상반기 추가 후속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정부의 대책을 환영했다. 한국화학산업협회는 관계자는 <한스경제>에 “정부의 대책을 환영한다”며 “이번 대책 외에도 공정거래법 관련 사항 등 기업 간 정보 공유를 어렵게 하는 규제들도 완화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부의 적극적인 구조조정 개입에 대해서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오히려 현재 시장 상황을 교란시킬 수 있고, 현 산업과 경제 상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대책 실행에 ‘탄핵 정국’이 변수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업계는 현 시국으로 인해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들이 추진력을 잃을까 걱정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조치가 관계 부처가 협력해야 하는데 탄핵 정국으로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단기간에 끝낼 수 없는 일인 만큼 정부가 제도의 틀을 마련한 것에 기업도 공감하고 있다”며 “제도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추가로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신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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