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4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전체 유대인 희생자 600만 명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한다. 한 장소에서 4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숨졌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목숨을 앗았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기억은 희미해도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서늘하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시간이 흘러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홀로코스트와 다를 바 없는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의 기억은 부질없다.

아우슈비츠를 회상하면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지독한 적막이다. 유럽 여느 관광지와 달리 아우슈비츠에서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하다.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웃음은커녕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믿기 어려운 학살 현장에 압도된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관광객들의 유별난 집단행동이다. 그날도 관람을 마친 이스라엘 청소년 20여명은 아우슈비츠 정문 앞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둘러싼 채 눈물을 흘리며 통성 기도를 올렸다. 자신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겪은 참상 앞에 그럴만하다고 공감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증오가 아닌 참회와 사랑을 배우고 돌아가길 염원했다.

헌데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는 증오와 참혹한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 하마스 공격에 이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그 땅에는 피가 흥건하다. 민간인을 죽이고 인질로 잡은 하마스 만행은 용서할 수 없다. 비록 억눌린 오랜 분노가 표출됐다고 하지만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보복공격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성토하는 하마스 만행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피를 피로 갚는 원시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괴감을 지우기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는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 17일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병원을 공격해 500명 이상 숨졌다. 무고한 인명 피해 앞에 국제사회는 분노하고 있다.

아랍권에는 반 이스라엘 불길이 번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자치정부 청사가 있는 라말라에서 이스라엘 공습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또 이집트 카이로와 예멘 타이즈, 모로코 라바트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도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레바논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분노의 날’로 선언했다.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레바논 시민들도 서구사회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든다며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이란 외무장관은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에 참을 만큼 참았다는 뜻에서 “타임 이스 오버(Time is Over)”라며 분노를 표했다. 세계보건기구(WHO) 또한 “병원 공격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이란은 반 이스라엘 전선에서 선두에 서있다.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겨눈 범죄와 관련해 심판받아야 한다”면서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범죄가 계속된다면, 이슬람교도와 저항 세력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란 외무장관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취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을 것,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라며 사실상 선전 포고했다. 이란과 레바논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이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중동전쟁으로 확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8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제를 촉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지는 미지수다.

굳이 근본적인 책임을 따지자면 이스라엘에 있다. 수년 전 현지 취재를 통해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폭력을 확인했다.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고 팔레스타인인을 압박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아예 팔레스타인 절멸정책을 추진했다.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을 제한한데 이어 정착촌을 건설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잠식했다. 또 자국민 보호를 앞세워 팔레스타인인 자치 지역을 콘크리트 담장으로 봉쇄했다. 팔레스타인인은 수 십 년 동안 거주 이전자유를 박탈당하고 물과 전기, 식량난에 허덕여 왔다. 팔레스타인인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대적인 지상군 파병을 예고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가자지구 상황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고 있다. 콘크리트 담장으로 봉쇄된 가자지구는 거대한 감옥에 불과하다.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갈 방도가 없다. 있는 자리에서 죽든, 조금 더 가서 죽든 두 가지 선택만 있을 뿐이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공습과 지상군 파병은 묻지마 살육이다. 80여 년 전 나치는 유대인들을 독가스 실에 가두고 죽였다. 나치와 이스라엘 정부는 다른가. 아우슈비츠에서 비극을 돌아보지 못한 채 피의 보복을 일삼는다면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다. 우리 또한 문명사회에서 벌어지는 살육을 구경만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문명국가인가에 답할 때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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