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합의파기' 北 사과없이 대화 추진할 경우 '역풍' 우려하나
北, 식량난·방역위기에 민감…南 적극적 태도 취하면 빗장 걸수도

[한스경제=김동용 기자] 남북이 27일 정전협정일을 맞아 군(軍) 통신연락선을 복원했지만 청와대는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외신보도에도 즉각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등 한반도정세를 둘러싼 긍정적 관측에도 자제를 요구하는 모습이다.
지난 4년 동안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실현을 위해 전방위 외교를 펼치면서 국내 행사마다 북한과의 대화로 이끌어낸 성과를 강조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면 최근 청와대의 태도는 어색할 정도다. 이에 정치권 일각에선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문재인정부로서는 대북정책이 한 번 더 어긋날 경우 내년 대선에 미칠 역풍을 고려할 수박에 없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남북 군 통신선이 복원되자 국내외 언론은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어떤 후속 조치가 논의될 지 주목했다. 식량문제·코로나19 백신 지원 등 경제협력부터 고위급회담이나 정상회담 등 굵직한 이벤트까지 전망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 간 정상회담 논의' 보도였지만 청와대는 즉시 부인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28일 우리정부 소식통 3명을 인용해 남북이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하고 있다는 로이터통신 보도와 관련 출입기자단에 메시지를 통해 "사실이 아니다. 논의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청와대는 전날에도 통신선 복원을 계기로 "남북정상 간 접촉이나 화상회담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까지 문재인정부는 대북 정책에 적극적 스탠스를 취해왔다.
하지만 이번 통신선 복원에 대해 청와대가 취하는 입장은 매우 신중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데다 연락사무소 폭파·해수부 공무원 피살·대통령 비난 담화 등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 통신선만 복원된 상황이지만 야권에선 이미 실익없는 '대선용 이벤트'가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남북대화 재개에 앞서 북한의 사과가 우선이라는 목소리도 거세다. 특히 일부 국민의힘 대권주자들은 북한의 대선개입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은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긴장을 실질적으로 완화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간 대화를 피할 이유는 없으나 문재인정부의 그동안 행적에 비춰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며 "북한이 우리 대선에 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유 전 의원은 "내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에 그들이 다루기 편한 정권이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움직일 때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그러나 소리만 요란했던 싱가포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과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모두 북한 비핵화와 인권 개선에 아무런 진전도 이뤄내지 못했다"고 상기시켰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2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군 통신선 복원에 대해 "북한 치트키(게임을 유리하게 진행하도록 하는 속임수) 쓰려는 문재인정권의 잔꾀"라고 평가절하 했다.
원 지사는 "청해부대 집단감염·백신 부족·무너진 경제·망가진 부동산·김경수 전 경남지사 구속 등 악재가 이어지니 한다는 대처가 고작 북한발 훈풍 작전"이라며 "국가 운영을 엉망으로 하면서 위기가 찾아올 때면 쓰는 '북한 치트키'"라고 주장했다.
원 지사는 "남북 관계는 분명히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서 쇼만 하는 것은 오히려 남북 관계를 망치는 일"이라며 "문재인 정권 4년간 나라를 망가뜨린 것 외에 어떤 성과가 있느냐. 성과도 없고 잘못했다고 사과도 안 하는 '철면피 정권'"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27일 입장문을 내고 "이번 일을 가지고 마치 한반도 평화가 눈앞에 다가온 양 들떠서는 결코 안 된다. 차분히 상황을 관리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며 "남북관계 이슈가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한 일회성 쇼에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최 전 원장은 앞서 이날 경기 연천군 유엔군화장터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취재진을 만나 "남북 연락사무소가 처참하게 폭파되는 장면을 같이 봤고, 서해에서 우리 공무원이 북한군 총격에 사살되고 시신마저 불태워지는 상황에 대해 우리 정부는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며 "과연 우리 정부가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생명과 평화를 지킬 의지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햇다.
국민의힘에 입당하진 않았지만 범야권 유력 대권주자인 윤석열 예비후보는 27일 방문한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취재진을 만나 "애초에 핫라인이 끊어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해수부 공무원 사살·개성연락사무소 폭발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닌 북한의 심기만 살핀다면 큰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복원된 건 다행이지만 남북한 민감한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며 "우리가 조금 더 개성연락사무소 폭발·해수부 공무원 사살 등에 대해 주장을 하고 (북한 측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고 덧붙였다.

야권의 반응을 차치하더라도 청와대는 기존 방식대로 적극적 스탠스를 취할 경우 식량난과 방역위기 등으로 체제 불안을 느끼고 있는 북한이 다시 빗장을 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여진다. 남측의 태도와 상관없이 최근 중국에 밀착한 북한이 미중 패권 경쟁 향방에 따라 다시 한반도정세를 대결국면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통신선을 복원한 다음날인 28일 조중(북중)우의탑에 헌화하고 북중 친선과 항미원조 역사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29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께서 조국해방전쟁 승리 68돌에 즈음하여 7월 28일 우의탑을 찾으셨다"며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조·중친선은 공동의 위업을 위한 한길에서 대를 이어 굳건히 계승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가열 처절한 전화의 나날들에 우리 군대와 어깨 겯고 싸운 지원군 장병들의 참다운 전투적 우의와 무비의 희생정신은 전승의 역사와 우리 인민의 기억 속에 역력히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조중우의탑은 중공군의 한국전쟁(6·25) 참전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북한과 중국이 미국에 맞선 항미원조 정신을 상징한다.
청와대는 국내외 상황을 다각적으로 고려해 당분간 대북 정책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9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지금 남북 상황은) 정확하게는 서로 '우리 언제 밥 한번 하자' 정도"라고 평가했다.
윤 의원은 "(남북 간을 포함해 국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정상회담이 대한민국 정부의 목표는 아니다"라며 "우리 목표는 한반도 평화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상회담은 그 과정에서 성과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윤 의원은 "긍정적 시그널은 분명하지만 막연한 기대나 추측은 성급하다"며 "코로나 상황 등 북한도 내치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이 서로 양보하지 않는 샅바싸움을 벌이는 등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김동용 기자 dy0728@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