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점 만점에 56점. 2015년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지수(CPI) 점수다. OECD 34개국 중 27위로 평균 69.6점에 크게 못 미친다.
은행을 떠나면 돌아오는 비율이 40%에 불과하다는 ‘함흥차사’ 5만원권 이야기도 ‘부패공화국’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김영란법은 그래서 나왔다. 처음 제안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이름을 딴 이 법의 본명은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금지법’이다. 지난 9일에 입법예고된 김영란법 시행령에는 공직자 등이 3만원 이상의 식사, 5만원 이상의 선물, 10만원 이상의 경조사비를 제공받으면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 농축산 업계 등“김영란법 시행되면 매출 하락 필연적”
농축산ㆍ유통ㆍ화훼ㆍ외식 등 접대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업계에선 김영란법의 시행령이 입법예고외자 큰 폭의 매출감소가 우려된다며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영란법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선물에 대한 금액 제한이다. 우리나라에는 명절마다 선물을 주고 받는 문화가 있고 이것이 일부 업계에서는 매출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때문에 농축산 업계 등은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매출의 상당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농협은 시행령 발표 직후 긴급성명을 통해 “김영란법이 농업인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농협에 따르면 명절기간에 판매되는 농축산물 선물세트 중 과일 50%, 인삼 70%, 한우 98% 이상이 5만원을 넘는 다. 농협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여기에서 수익을 얻는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많은 농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단법인 ‘전국한우협회’도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에서 집회를 열고 김영란법에서 농축산물을 예외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축산업계는 작년 한우의 총 매출 4조3,000억원 중 명절 매출이 8,000억원라며 김영란법으로 이 정도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화훼업계도 김영란법으로 연간 1조원 수준의 화환, 난 시장이 위축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외식업계 역시 김영란법에 따라 연간 매출의 5% 정도인 4조1,500억원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사단법인 한국외식업중앙회 산하의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다.
백화점 등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김영란법의 영향을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며 “아직은 수정 가능성이 있고 위헌소송 등도 걸려있는 만큼 관망 중이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기자협회와 대한변호사협회, 사립학교 장 등은 김영란법이 민간의 사적 영역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 “오히려 경제성장률 0.6% 포인트 상승 가능”
하지만 현대경제연구원은 청탁금지법의 적정 가액기준 판단 및 경제효과 분석’ 보고서를 통해 김영란법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미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권익위의 용역을 받아 작성된 이 보고서는 실효성 있는 가액기준을 추정하고 김영란법으로 인한 경제계의 충격을 예측했다. 이번 시행령의 기준 금액도 이를 반영해 결정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2015년 6월 기준 약 183만명이다. 정부 및 공공기관인이 약 101만명, 학교 및 학교법인 관계자가 약 66만명, 언론인이 약 21만명이다. 전체 인구의 4.4%, 취업자 8.6%에 해당한다. 양질의 취업자수 중에서는 12.3%나 된다.
보고서는 지난 2014년 기준 공무원행동강령에 따른 금품수수 위반자가 0.06%였다는 자료를 기준으로 선물 수요 감소폭을 최소 0.0052%라고 예상했다. 적용대상자 중 5%가 선물을 받고 있었다면 0.43%, 7%라면 최대 0.86% 다. 업계가 주장하는 것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보고서는 화훼산업 역시 김영란법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봤다. 지난 2003년부터 식사비 3만원 한도 등을 규정한 공무원행동강령이 시행된 이후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김영란법 대상자들 중에는 화훼 선물 수요가 적다고 추정했다.
반면 보고서는 김영란법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점수를 줬다. 부패 수준이 낮은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매년 0.6~1.4% 높게 성장하고 있다는 자료도 덧붙였다.
보고서가 주장한 김영란법의 긍정적인 효과는 먼저 기업의 경영효율화 증대다. 김영란법이 기업의 접대비를 줄여 경영에 투자할 수 있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제품 소비자 가격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있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보고서는 접대문화가 없어지면 접대를 잘하는 기업이 아닌, 기술이 있는 기업이 수혜를 입을 수 있어 산업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김영란법이 우리나라 경제의 중대한 문제 중 하나인 지하경제 양성화에도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의 한 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재미동포 A씨는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한 선물 비용은 고스란히 물건값에 반영돼 소비자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고, 투명하지 못한 공직사회는 기업발전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며 “미국의 상당수 주에선 공직자가 민원인으로부터 커피 한잔을 얻어 먹어도 엄벌을 피할 수 없는데, 아직 한국에선 그런 규제가 너무 느슨한 것 같다”고 김영란법의 보다 엄격한 적용을 주문했다.
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B 씨는 “공무원들은 기업체의 리스트에 남는 명절 선물은 잘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금 뇌물을 받는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공직자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보수를 받고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집단인 만큼 민원인들로부터 그 어떤 선물도 받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접대관행이 사라지면 기업의 투자도 보다 활성화될 수 있고 기업하는 사람들은 종업원들의 복지에도 더욱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김영란법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공감
김영란법으로 인해 피해를 우려하는 이들도 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외식산업연구원이 1,000명의 사업자를 대상으로 김영란법의 필요성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35.9%가 찬성했고 29.5%만 반대했다.
다른 업계도 마찬가지였다. 화훼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연히 대가성으로 쓸 수 있는 초고가 난 선물까지 허용하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라며 “화훼는 개인에 대한 선물보다는 사무실로 주는 성격이 강하고 가격이 10만원 전후인 만큼 제한만 조금 높여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과수업계 관계자도 “10만원 정도인 과일박스를 뇌물 성격으로 선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며 “선물을 주고 받는 전통도 유지하고 업계 사정도 고려하는 선에서 김영란법이 수정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권익위 관계자는 “김영란법은 시행 전까지 여론을 최대한 수렴해 최종안을 만들 예정”이라며 “오는 24일 공청회를 비롯해 입법예고가 끝나는 다음달 22일까지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으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웅 기자 jukoas@sporbiz.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