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라 정상에서 은빛 토롱라를 바라보며 마음을 정화하다 (19)

추상~테탕~규라

2025-06-24     김성태 사진작가
무스탕 트레킹 코스 / 한스경제

[한스경제] 트레킹의 마지막 코스인 묵티나트를 향해 출발한다. 해발 2,980m에서 4,077m까지 고도를 1,100m 가까이 올리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타야 한다. 누적된 피로 속에 쉽지 않은 코스다. 장기간의 강행군으로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가 되면서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정신력도 방전이 심하다. 출발부터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그동안 못 느끼던 카메라 무게가 어깨와 가슴을 짓누른다. 그래도 어제 28km의 장거리에 4,000m가 넘는 고개를 서너 개 넘어서 그런지 오늘 가장 높은 규라(4,077m)를 넘는데 큰 부담을 못 느낀다.

파이프 오르간 형태의 거대한 석주형 절벽을 향해 오르막 너덜 길을 오르는 트레커.

추상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테탕 마을을 만난다. 돌담이 많은 요새 마을이다. 테탕(Tetang.3040m)은 원래 초기의 추상마을 정착지로 알려졌다. 오래돼 폐허가 된 성곽 요새 유적과 논두렁 같은 돌담, 낡고 투박한 초르텐, 마을 반대편의 동굴절벽 등 주변 풍경이 거칠면서 아름답다. 나르싱콜라 절벽 쪽에 큰 성채가 있고 그 옆에 폐허로 변한 요새가 있다. 

테탕마을 입구에 수호신처럼 서 있는 투박한 불탑.
높은 돌담에 둘러싸인 소 외양간. 마을 경계, 밭, 과수원, 가옥 담장 등이 모두 돌담이다.

테탕마을은 전체가구의 3분의 1이 대도시 등 바깥 세계로 이사를 가 빈집으로 공동화되고 있다. 나머지 3분의 2가구도 대부분 가족 중 1명 이상이 해외나 도시로 돈 벌러 떠난 것으로 조사된다. 방치된 채 쓰러져 가는 빈집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코랄라 하이웨이의 개통 등 개방으로 외국인 관광객과 문명 세계의 이기가 들어오면서 사회, 문화, 인종, 전통,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시간이 멈춰 선 듯 과거 속 신비의 왕국이었던 무스탕이 외부의 변화 바람에 신음하고 있다. 원주민인 로바들의 이주가 가속화되고 외지인의 무스탕 전입이 늘고 있다. 무스탕의 정체성은 물론 인종 구성 등 무스탕다운 본모습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불탑이 있는 마을 뒤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르는 트레커들.

테탕은 무스탕에서 지상 소금이 많이 나오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계곡 절벽이나 산 사면에 희끗희끗 흰색의 흙이 많이 보인다. 테탕에서 나르싱 콜라를 따라 두 시간 오르면 지금은 폐쇄된 오랜 동굴 소금 광산이 있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에서 인도로 돌아가던 중 이곳 테탕에 소금 포대를 다 풀어놓아 많은 소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마을 안에 키 높이 순서대로 서 있는 불탑. 낡고 투박해 더 성스러워 보인다.
주황색의 거대한 암봉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한 테탕마을과 초록의 밭.

오르고 올라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고도가 4,000m에 가까우니 완만한 경사길이라고 해도 조금만 오르면 숨이 찬다. 계곡 아래 칼리간다키 강이 햇빛에 반짝이며 꼬리치는 꽃뱀처럼 요염하게 흐른다. 오르막 언덕이 끝없이 이어진다. 급경사의 산 사면에 희미하게 난 폭이 30cm 안팎인 좁은 마사토길이나 너덜 벼랑길을 걸을 때 신경을 곤두세운다. 저 멀리 하늘을 가르며 서 있는 만년설의 닐기리와 틸리초가 눈을 즐겁게 하며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삭막한 고산 사막지대에서 바라보는 순백의 설산은 지친 트레커들에게는 청량제이다. 저 언덕을 넘으면 또 어떤 멋진 풍광이 펼쳐질까? 기대와 설렘은 지친 체력과 정신력에 활력소 역할을 한다. 

황량한 골짜기 언덕 사면을 염소들이 지나가고 있다.
트레커들이 계곡 사이 산 사면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벼랑길을 따라 걷고 있다.

걷다 보면 고요와 침묵이 자연과 나를 하나로 묶으며 마음과 생각에 안정과 균형감이 깃든다. 오지 트레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걷기 명상의 매력이다. 오랜 기간의 오지 걷기와 40여 년의 단전호흡, 명상 등이 걷기 명상의 참맛을 알게 한 것 같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속에 걸으며 나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고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인 내면의 자아를 들여다보고 발견하면서 말 없는 대화를 나눈다. 일에 매몰돼 나 자신을 잃은 채 남을 의식하며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온 나. 가식의 껍데기인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게 해 준 오지 트레킹과 걷기 명상은 나를 있게 하는 실존이다.

트레커들이 SF영화에 나오는 외계행성의 모습 같은 거친 바위 절벽 아래를 걷고 있다.
양치기 아저씨의 모습. 친절하게 다가와 길을 안내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까지 취해준다.

바늘 한 귀 꼽을 틈새 없는 마음자리에 무스탕 히말라야가 듬직하게 똬리를 튼다. 세상이, 시간의 흐름이 나와 연관된 모든 관계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의 관점과 크기, 넓이, 깊이, 숨어있던 자아가, 실체가 애매했던 가치관이 단단한 껍데기를 깨며 나다움을 만들어 간다. 고통을 뛰어넘는 성취감만큼 끈기 인내 극기심은 나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준다. 오지 트레킹이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유지시켜 주며 나를 젊고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정상인 규라까지 인적이 끊긴 가파른 오르막길이 쉼 없이 이어진다.
수천만 년 시간과 비바람이 만들어 낸 고목 등걸 모양의 낯설고 괴기한 절벽 사면 풍경.

모퉁이를 돌고 낮은 언덕을 넘을 때마다 룽다나 타루쵸가 눈에 잡히기를 기대하다가 실망한다. 대개 패스나 높은 고개 꼭대기에는 정상 표시로 룽다나 타루쵸가 펄럭인다. 고개를 넘는 트레커에게는 가장 반가운 희망의 깃발이다. 산이나 언덕의 정상을 표시하거나 마을이 가까이에 있다고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여행자들이 건강과 안전을 비는 기도처이자 위안을 받는 휴식의 장소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이 온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져 불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고 좋은 업과 마을에 행운이 깃들기를 소망하는 성스러운 불교 상징물이기도 하다. 

널찍한 고개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에 매달린 룽다와 타루쵸. 계곡 건너편에 만리장성 같은 절벽이 병풍을 두르고 있다.

룽다는 곰파나 마을 언덕, 집 마당, 지붕에 세우는 긴 수직 깃발이다. 룽다의 깃폭은 청․백․적․녹․황 다섯 가지 색으로 된(흰색, 녹색 등 단색도 있음)깃발에는 부처님과 보살, 불경 등이 인쇄돼 있다. 이는 우주의 다섯 원소(공간․ 물․ 불․ 바람․ 땅)와 다섯 방향(중앙․ 동․ 남․ 서․ 북)을 상징한다. 룽다는 ‘바람의 말(風馬)’이라는 뜻이다. 룽다의 모습이 바람을 향해 앞발을 들고 선 말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펄럭이는 깃발은 말의 갈기이다. 깃발은 나부끼며 히말라야에서 부는 바람을 걸러준다. 무스탕인은 룽다가 탁하고 거세고 찬 바람을 맑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척박한 히말라야에서 생존하기 위한 자기 위안의 방편이며, 티베트 불교가 고달픈 중생들을 위해 마련한 따뜻한 배려다. 타르쵸는 오색 깃발을 만국기처럼 수평으로 줄을 이용하여 달아 놓은 것으로 깃발에 새겨진 내용은 룽다와 같다. 히말라야에서 산악인들이 등반 전에 돌을 쌓아 만든 마니퇴에 사방으로 타루쵸를 매달아 놓고 라마제를 지낸다. 타르쵸가 너무 길어 땅에 처진 경우, 타르초를 타고 넘으면 안된다. 타르초를 들어 그 아래로 통과해야 한다. 불경과 불보살들이 새겨진 타르초를 넘는 것은 금기이다. 

규라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쌓인 눈이 보인다.

지상의 풍광이 고개나 산모퉁이 구비 마다 카멜레온처럼 바뀐다. 무스탕만이 갖는 무스탕 특유의 무스탕다운 색다른 풍경의 연속이다. 올라도 나오고 넘어도 계속 나타나는 가파른 고개에 지칠 만도 한데 가슴을 뛰게 하는 풍광에 취하다 보면 힘든 줄 모른다. 특이지형의 산줄기와 계곡을 타고 등성이를 몇 구비 돌며 기약 없이 걷는다. 저 멀리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이는 고개 정상 너머에서 묵티나트가 바로 발밑에 보일까? 힘들게 기어올라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앞서는 것을 보면 타고난 역마살 끼가 있나 보다. 멀리서 야호 소리가 들린다. 앞서가던 별명이 부처님인 포터 겔룩이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이는 고개 정상에서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 모두 저기만 오르면 고생 끝이라며 기운을 낸다. 저 앞에 타루쵸가 휘날리는 규라가 올려다보인다. 

규라 정상의 징표인 마니퇴 위의 룽다와 타루쵸.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에 눈이 부시다.

드디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트레일의 마지막 패스인 해발 4,077m의 규라(Gyu La)정상에 오른다. 윙윙 울어대는 바람 소리와 아우성치듯 펄럭이는 타루쵸 깃발 소리가 신의 숨결처럼 신성하다. 무스탕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탁 트인 시야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허공에 길게 늘어선 타루쵸 사이로 은빛 안나푸르나 산군이 하늘을 가르며 웅자를 뽐낸다, 저 아래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인 묵티나트가 자리 잡고 있겠지. 힘들었던 고행의 무스탕 트레킹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육체적으로는 한계에 이를 정도로 힘든 적이 많았지만 정신은 벅차오르는 기대와 보람에 박달나무를 닮아간 것 같다. 넘치는 자존감에 가슴이 뿌듯하다. 

트레커가 정상 마니퇴 돌에 앉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만년설의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며 묵티나트를 향해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트레커.

10여 일 동안 200km에 가까운 해발 3,000~4,000m의 고산 사막지대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걷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한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은 상념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린다. 정신적 육체적 한계상황을 극복하며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와서 얻은 게 무엇인가. 나를 버리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알량한 허명이나 과시욕 때문에, 아니면 내가 좋아서, 자기만족을 위해...? 고행길이었던 무스탕 트레킹의 마무리는 나에게는 또 다른 여정의 출발점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