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탄소가격제 도입 확산···필요성은 인정, 속도조절은 필요
탄소집약적 사업구조에 탄소배출량 감축 인프라도 부족한 우리 기업 실정도 감안해야
[한스경제=박종훈 기자] 기업이 기후 관련 비즈니스 리스크를 관리하고 저탄소 사업구조로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탄소배출량을 가격 책정해 투자나 프로젝트의 가치를 평가하는 내부 탄소가격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이다. 그 효용과 필요성은 충분하지만, 우선 국제기구 등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으며, 특히 우리나라 실정도 고려하자면 연착륙 방안을 고민해야 할 필요도 있다.
통상 기업이 경영전략을 수립할 때 앞세우는 것은 재무적 이익이다. 그러나 내부 탄소가격제와 같은 제도는 환경 측면에서의 편익도 동시에 고려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이에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도 은행들이 투자 포트폴리오 결정을 내릴 때 내부 탄소가격제를 적용하도록 권고하기도 한다.
세계은행(WB)이 2023년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기준 탄소 정보공개 프로젝트(CDP)에 기후정보를 공개한 전 세계 기업들 중 1203개 기업이 내부 탄소가격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또한 1500개 이상 기업이 향후 2년 내 내부 탄소가격제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부 탄소가격제는 굴지의 IT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2012년 도입하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14년 150개에서 2017년 607개, 2020년 863개로 도입 기업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CDP에 기후정보를 공개하는 기업들 중 살펴본 것인데, 2023년 기준 전 세계 2만 3293개 기업이 공개하고 있으므로, 크게 늘었다곤 하지만 아직 내부 탄소가격제 도입도 갈 길이 멀다. 참고로 우리나라 기업은 모두 211곳이 CDP에 기후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인 엑손모빌, 쉘, BP 등도 내부 탄소가격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TCFD 권고에 따라 JP모간 체이스, BNP 파리바, 씨티, 뱅크 오브 아메리카, HSBC 등의 금융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선 2022년부터 KT&G,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제조업 부문 대기업들이 도입했다.
이러한 내부 탄소가격제는 여러 유형과 방식으로 운용된다. 그중 잘 알려진 것은 그림자 탄소 가격이다. 탄소배출 1단위당 가격을 명시적으로 설정해 시설투자나 R&D 등 자본적 지출이 필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 탄소배출의 영향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실제 금전적 비용을 부과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탄소가격 시나리오 아래서 프로젝트와 투자 성과를 비교하는 데 일종의 지표처럼 쓸 수 있다.
CDP가 2021년 발표한 것에 따르면 내부 탄소가격제를 도입한 기업 중 50.8%가 이 그림자 탄소 가격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보다는 훨씬 '강제적'이고 실제 비용이 발생하는 방식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활용하고 있는 탄소 수수료(Carbon Fees) 방식이다. 기업 내에서 사업이나 부서 단위로 탄소배출량에 비례해 수수료를 실제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은 수수료는 별도 기금을 조성하거나 시업 내 다른 사업이나 부서에 재분배해 다양한 지속가능성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예를 들면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내부 탄소가격을 설정하면, 각 사업부서는 탄소배출량에 따라 수수료를 납부한다. 이를 통해 조성된 기금을 탄소배출 저감 투자, 에너지효율 증진 사업, 탄소상쇄 프로젝트 등에 대한 투자재원으로 쓴다.
오프셋 구매도 직접적인 비용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탄소 오프셋을 구입하는 방식인데, 기업이 사업장 내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완전히 없앨 수 없을 때 외부 환경 프로젝트에서 감축한 배출량을 구입해 이를 상쇄하는 방식이다.
기업 내부에서 탄소 거래시장을 개설해 탄소배출 한도를 초과한 부서가, 여유가 있는 다른 부서로부터 탄소 크레딧을 구입하는 내부 탄소 거래 방식도 있다. 또한 암묵적(Implict) 탄소 가격은 이미 집행된 탄소감축 조치들로 산출된 한계 감축비용이나 기업·정부의 탄소감축 목표에 부합하는 이론적인 탄소가격을 이용해 기업의 탄소 리스크를 대략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점차 많은 기업들이 내부 탄소가격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국제기구나 환경관련 단체들이 제안하고 있는 '수준'엔 아직 미치지 못한다.
지구의 온도상승을 제한하기 위해 탄소에 가격을 매겨 배출을 규제하자는 아이디어가 소위 탄소가격제인 것인데, 국제기구가 제안하고 있는 가격보다 기업들 내부서 책정한 가격이 현저하게 낮다는 의미다.
가령 지난 2017년 조셉 스티클리츠와 니콜라스 스턴과 같은 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폭을 2°C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탄소가격이 2017년 실질가치 기준으로 2020년엔 최소 미화 40달러~80달러에 도달해야 하며, 2030년까지 50~100달러 수준에 있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한 녹색금융을 위한 중앙은행·감독기구간 글로벌 협의체(NGFS)도 마찬가지 목표를 위해 탄소가격이 2023년 실질가치 기준 2030년까지 69달러는 되어야 하며, 2050년까지 276달러는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WB에 따르면 내부 탄소가격제를 도입한 기업 중 절반 이상이 WB 권고 최저가격인 4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탄소가격을 적용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임진 선임연구위원은 '내부 탄소가격제 도입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내고 "내부 탄소가격제는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기회와 위험을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제도 도입이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기업의 상황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고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제언한다.
제도의 긍정적 효과는 다양하다. 우선 저탄소 부문으로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이 자연스레 유도될 수 있다. 이는 곧 탄소가격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 규제환경의 변화에 더 잘 대비할 수 있을 거란 의미다.
아울러 내부 탄소가격제를 운용한다는 것은 탄소배출량 감축을 비즈니스 운영의 주요 고려사항으로 격상하는 것이기에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기후변화 문제 등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기업 내부적으로도 이 이슈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을 제고할 수 있다.
임진 선임연구위원은 "다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은 탄소집약적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한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내부 탄소 수수료, 오프셋 구매, 내부 탄소 거래와 같은 방식을 채택할 경우에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될 우려가 있다"며 "그림자 탄소 가격제도를 우선적으로 도입하고 탄소가격도 낮은 수준에서 시작해 점차 높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