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의 창(窓)]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믿기지 않겠지만 꼬박 30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불법‧관권선거를 모의했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 전말은 이렇다. 때는 14대 대선을 1주일여 앞둔 1992년 12월 11일이었다. 당시 대선은 민주자유당 김영삼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3파전이었다. 누구도 압도적 우위를 자신하기 어려웠다. '부울경’에서 야당은 선전했다. 특히 현대중공업이 가동 중인 울산은 반값 아파트를 내건 정주영 후보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런 구도 속에서 부산지역 기관장들은 민자당 김영삼을 돕기 위해 초원복집에서 머리를 맞댔다.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해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지검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부산시교육감, 부산상회의소 회장까지 참석자 면면은 화려했다. 이날 비밀 회동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김대중, 정주영이 당선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한다”는 말이 오갔다. 국민당과 전직 안기부 직원은 발언 내용을 도청해 공개했다. 여론은 김영삼 후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공직자가 관권선거를 공모하고 또 망국적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당시 여당과 김영삼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이내 ‘관권선거’ 논란은 수그러들고 ‘불법도청’ 사건으로 전환됐다.
초원복집 사건은 지금 기준대로라면 중형을 피하기 어렵다. 원세훈 국정원장(4년 형)과 김경수 경남지사(2년 형)는 여론조작과 댓글 조작만으로도 중형을 받았다. 허나 당시는 관권선거가 판치던 때였다. 결국 불법도청 프레임으로 국민당을 공격하는 보수언론에 힘입어 김영삼은 당선됐다. 위기를 느낀 영남지역 유권자가 결집한 결과였다. 비밀 회동을 주동한 김기춘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반면 국민당 관계자는 불법도청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본말이 전도된 전형적인 프레임 조작 사건이다. 도둑질한 사람은 면죄부 받고 신고한 사람이 되레 벌을 받았으니 황당했다.
30년이 흘러 윤석열 정부에서 유사한 프레임 조작을 시도하고 있다. 단초는 윤 대통령이 제공했다. 유엔총회 순방외교에서 윤 대통령이 뱉은 비속어 파문으로 여야가 공방을 펼치는 가운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비속어 논란을 ‘가짜뉴스’로 규정한 채 공세로 전환했다. MBC 항의 방문에 이어 검찰 고발장까지 접수하며 가짜뉴스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MBC가 악의적으로 발언 내용을 짜깁기함으로써 대통령실과 국익을 훼손했다는 주장이다. 발언 영상을 접한 대다수 국민들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사과했으면 헤프닝으로 끝날 일을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대응이 그렇다. 국민들은 발언 내용도 그렇지만 후속 대응에 실망했다. 대통령이 외교 무대에서 비속어를 내뱉고, 국회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인식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엉뚱한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으니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 설령 MBC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질 낮은 언어습관을 노출함으로써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는 윤 대통령이다. 또 늑장 해명과 말 바꾸기로 논란을 키운 대통령실 책임도 상당하다.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 ‘미국 의회’가 아니라 ‘대한민국 야당’이라고 했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사과했다면 끝날 일이다. 야당도 더 이상 공격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반대로 움직였다. 상황을 뒤집기 위해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지만 수긍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층에서조차 조잡한 해명과 궁색한 대응을 문제 삼을 정도다. MBC에 대한 비판보다 오히려 윤 대통령의 불통과 고집 이미지만 부각됐다. 유감 표명이나 발언 경위에 대한 설명 없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데 대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했으니 어안이 벙벙하다. 때 아닌 ‘MBC 편파·조작 방송 진상규명 TF’는 5공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편향보도 시비를 자초한 MBC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MBC는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을 보도했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국정 동력을 상실했다. 법원은 거짓과 과장이라고 판결했고 MBC는 3년 만에 사과했다. 또 MBC는 채널A 기자와 한동훈 장관이 짜고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 비리를 조작하려 했다고 보도(2020년 3월 31일)했으나 이 또한 거짓이었다. 채널A 기자는 1심 무죄, 한동훈은 혐의 없음, 대신 MBC가 제보자와 짜고 채널A 기자를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박성제 MBC사장은 조국 수호 서초동 집회 당시 ‘딱 보니 100만명’이라는 편향 발언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비속어 논란을 ‘가짜뉴스’와 ‘권(정)언유착’으로 모는 건 너무 나갔다. 윤 대통령의 품격 없는 언행은 뒤로한 채 프레임 전환을 시도한다면 3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가 생각나는 아침이다.